3년전, 심장수술하고 한국에 가 있을 땐 수도자의 심정으로 예수원, 가평 필그림 하우스, 그리고 매일 새벽예배, 주일엔 세곳에서 예배를 드리며 나름대로 목사의 품위를 유지하며 보냈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갔었는데, 첫날 인천공항에 도착해 밖으로 나가자 유래없는 강추위는 바로 심장이 조여오는 통증을 주어 다시 공항으로 뛰어들어왔는데, 심장이 조여와 한참을 기다려여 했습니다. 뼈도 아물지 않고, 심장 문제도 있는데다가 한국에서 겨울을 맞이하는 일이 처음인지라 병원가는 일외에는 집사람이 오기 전까지는 대부분 집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두달동안 제가 떠나기 전에 계획한 일들은 대부분 지켰습니다. 첫째는 오렌지 가나안장로교회 예배안드리기 였습니다. 장로님들과 목회자들, 특히 송인서 전도사님을 믿고 나왔기에 아무리 보고 싶어도, 그리고 무슨 일이 발생했었도 그 일은 지금 일하시는 분들의 몫이다 생각하고 애써 잊고 지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더 멋지게 책임지셨습니다. 둘째, 빚을 갚고 싶었습니다. 처음 신학교를 나올 때 시골로 내려간 동기들, 목회를 힘들게 하는 친구들에게 미국에서 편안하게 목회하는 것 같아 마음의 빚이 있었고, 미 영사관에서 인터뷰할 때 딱 5년만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지키지 못한 것도 부담이었습니다. 그 부담을 돈으로 덜고자 정말 많은 돈(?)을 풀었습니다. 찾아가고 만나고 헌금하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만은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위로하고 밥먹고 돈주는 것이라 생각해서 멋지게 지냈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많은 돈을 사방에 풀다가 온 것이 처음입니다. ‘아 나누는 기쁨은 이것이구나’ 헌금을 주고 돌아설 때 정말 기뻤습니다. 세 번째, 삼촌으로 2달동안 살았습니다. 삼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이냐구요? 너무 추워 새벽예배도 못가고 집에만 있을 때 존경하는 목사님이 제 상황을 다 들으시고 “이번엔 목사로 살지말고 그냥 동네 삼촌으로 있다가 돌아가”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너무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글 한줄 쓰지 않았는데, 그것도 21살에 군대에서 타이핑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있는 일이고 두달동안 설교 요청이 와도 모두 거절하고 교회 성도로 예배드리다가 왔습니다. 넷째,어머니에게 약간의 인지 장애가 생기신 것을 보고 하루 세끼 따뜻한 밥을 해서 먹이는 여동생에게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어 어머니와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오렌지 가나안교회는 저에게 식구가 맞습니다. 그렇게 그리웠는데 막상 미국에 도착하자 어제 만났다가 헤어진 것처럼 다시 익숙해 졌습니다. 삼촌에서 바로 목사 모드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분들의 기도덕에 건강해졌고 잘 돌아왔습니다. 그리운 분들이 계신 오렌지 가나안장로교회가 참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