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목회하시던 연희동 모래내는 완전히 달려졌습니다. 개천 복구공사를 해서 겨울이면 스케이트 타고, 여름에는 개구리 잡던 모래내 하천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모래내 하천을 지나 충암여중을 다녔던 누나를 하교 시간에 맞춰 기다리곤 했습니다. 멀리서 쥐방울만 한 누나가 집채만 한 가방을 들고 오는 것이 보이면 달려가 가방을 들어주고 누나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둑길을 걸어왔습니다. 포크송을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했고, 화음을 넣어 누나랑 노래하며 오기도 했는데 누나는 저에게 가요를 알게한 노래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때 불렀던 노래중에 하나가 패티 김이 부른 ‘그대 없이는 못 살아’입니다.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지면은 못살아 떠나가면 못살아’
지난 목요일 저녁, 3달여만에 미국에 돌아왔습니다. 떠날 때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산소통을 신청하고 비행기를 탔는데, 올 때는 편안한 복장을 한 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마 옆에 집사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의 처음 한 달은 혼자 지내도 다 좋았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도 좋았고, 편하게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다니는 것, 온종일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 그리고 비가 쏟아지는 날씨도 다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자 생각 없이 책장을 넘기며, 창밖을 우두커니 보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울증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증상은 집사람이 오고 사라졌습니다. 집사람이 돌아갈 날이 가까워져 오자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엔 다른 병원 예약한 것까지 다 진행하고 돌아갈까 싶었는데, 집사람 없이 보낼 하루도 자신이 없어, 같이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교회에 대한 그리움, 교인들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아무리 은혜로운 예배를 드려도 가나안교회가 아니었기에 꼭 몸에 안 맞는 옷을 입고 드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형제들, 그리고 홀로되신 두 어머니를 챙기는 만남이 잦았습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 흘리는 어머니들의 눈물.
그분들도 ‘그대 없이는 못 살아’하는 장남과 장녀를 다시 보내야 합니다.
떠나기 전날까지 무리하다가 결국 둘 다 감기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빨리 교우들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24일 주일이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가나안 식구들 그리움에 ‘그대 없이는 못 살아’를 열심히 부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