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볼까 두렵다?
꿈을 잘 꾸는 편이 아닙니다. 설령 꾸었다 할지라도 자고 일어나면 기억을 못하거나 희미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나마 ‘개꿈’도 안꾸는 편입니다. 그런데, 며칠전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례하는 꿈이었습니다. 제 앞에는 신랑과 신부가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둘은 모두 머리를 밀어버린 남자 둘이었습니다. 제가 부부선서를 시키려고 하면서 제 등줄기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있습니다. “신랑은 신부를----” 그러면서 제가 그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누가 신랑입니까?” 그리고 좀더 진행을 하다가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면서 단을 내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잠이 깼습니다. 정말 꿈에 볼까 두렵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되었습니다.
어느 분이 만나자고 하셔서 두가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목사님은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에 다한 답변은 “저는 반대합니다. 성경이 그것은 죄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우리는 모두 죄인인데 왜 동성애만을 가지고 이야기 합니까? 동성애가 더 큰 죄입니까?”
두 번째 대답은 얼마전 신학적인 논쟁을 할 때 한국 목회자들이 다루었던 문제였습니다.
“동성애가 더큰 죄라는 것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동성애는 다른 수많은 죄중에 하나입니다. 동성애 하는 사람이나, 간음한 사람이나 모두 같은 죄인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더큰 죄를 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동성애’에 대해서 이렇게 민감합니까?
저는 여기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 동성애의 문제는 누가 더큰 죄인이냐 혹은 그것만 문제이냐의 사건이 아닙니다. 동성애자 목사, 장로, 안수집사 안수를 주는 문제는 교단이 스스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성애가 죄가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죄라고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을 버젓이 행하는 사람에게 성경을 쫓아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있어서 그 죄는 이미 죄가 아니니 마음껏 행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교단적으로 안수받는 사람에게는 이 질문을 던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 질문은 또한 교회에서도 던질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동성애를 반대하면서 우리가 더 의롭냐 그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문제는 동성애가 성경에 죄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건 이제 죄가 아니다라고 말하라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을 정죄하느냐?” “아니요” 그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나 저나 모두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정죄하지 않지만 그것은 죄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그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문제는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꿈에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닌 질문을 받고 대답해야 하는 실존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꿈에 볼까 두려운 일이 현실이 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