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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사도행전 13장을 읽으며 예정론을 생각해봅니다.2024-02-01 14:02
작성자 Level 10

사도행전 13장을 보면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과정 속에서 예정론에 대한 한번은 생각해 보시는 분들이 계신것 같습니다.  이에 관해 도움이 되실까 해서 글을 좀 적어 봅니다.  (하도 오랜만에 글을 올리니 어색하군요...)

 

  실제로 사도행전 14장 특히 48절의 말씀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자들이 믿게 되었다."라는 말은 앞절 46절에  이방인들이 스스로에게 구원받지 못할 자들로 스스로 정해 놓은 것들에 대해서 특히 이것은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에 의해 상대적으로 이방인들이 그렇게 스스로를 여기고 있었던 터라 바울이 자신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셨다라는 말과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울이 그의 설교 가운데 잘 풀어 주자 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씀인데 누가의 의도는 그들역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영생이 작정된 이들이라고 표현하여 바울의 이방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예정에 대해 우리가 생각할 때에 칼빈주의적인 예정론이 거부감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정론의 출발을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예정론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시작으로 구원을 얻게된 이들이 제한되었다는데에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아쉬울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구원을 받는다면 과연 그 구원의 은혜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의미에서 선택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으로 그리고, 유기는 어떤 이들은 그저 내버려 두심으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위한 방편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정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게 갖는 것일까요?  그것을 아주 쉽게 풀어 드리겠습니다.
  예정에 대한 출발은 선택과 유기에서 출발하였다면 그 생각을 잠시 내려 놓으시고, 그 출발을 "하나님의 주권"에서 시작해 보십시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은 100%입니다.  누군가의 노력으로 하나님이 구원을 만드시고 마시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도 하나님의 주권에서부터 시작하며, 끝도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으로 끝이 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칼빈주의자들이나 웨슬리안이나 모두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여기서 칼빈주의에 반대되는 알미니안주의를  용어로 사용하지 않고 웨슬리안이라고 사용하는 이유는 비록 웨슬리안들이 알미니안의 후손들이라고는 하지만, 어거스틴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칼빈주의자와 강력하게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칼빈주의자나 웨슬리안이나 모두다 "하나님께서 구원에 있어서 Initiative를 갖고 있다는데에는 동의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인류 구원의 길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는 즉 사람들에게 나타내어지는 것으로서의 "은혜, 또는 은총"의 역사가 서로 다르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웨슬리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얻기 위한 선재적(미리 나타난) 은총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신 은총이라는 의미로   "선행은총"이라고 합니다. 이 선행은총 사상은 그 은혜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데 죄로 인해 절대로 은혜를 찾고 구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모든 인간들에게 동일하게 그들의 죄를 깨닫고 돌이길 수 있도록 은총을 허락하시어서 깨닫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 보증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구원을 이루어 간다고 해서 유식한 말로 "복음적 신인 협력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 칼빈주의자들의 입장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은총이 누군가에 의해서 선택되어지고 거부되어진다면 그 은혜가 무슨 능력을 갖게 되느냐?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에의해 선택적으로 작용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시발자가  하나님이신 만큼 그 은혜의 능력이 하나님께서 구원을 얻도록 되어진 이들에게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 들어온 이들은 어찌되었든지 간에 성령의 견인을 받아 결국 구원에 이르도록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은 은총에서 시작되는데 한쪽(웨슬리안)에서는 인간의 응답에 의해 다른 한쪽(칼빈주의)에서는 은총의 저항할 수 없는 능력에서 구원이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이론이 모두다 구원을 얻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성령의 역사하심과 동역하면서 성화의 과정을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두 이론가들의 싸움은 사실 선택과 유기의 하나님과의 싸움이 아니라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와의 관계를 논하는데에 더 많은 노력들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선택과 유기의 잔인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두 이론가들을 싸움에 붙이기 위한 다른 이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천국에 관한 비유가 하나 나옵니다. 

  칼빈주의자들이나 웨슬리안 모두에게 교훈이 되는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보면 어느 나라의 왕이 자신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여기에서 처음에 초대받은 이들은 말 그래도 왕에게 선택받은 이들입니다.  성경은 물론 유대인들을 비유하여 말하는 것이긴하지만, 불행이도 이들은 모두다 초대에 응하지도 않았을 뿐아니라 왕이 보낸 종들까지 다 살해해 버립니다.   그러자, 왕은 천국에 들어오는 조건을 대폭 완화시킵니다.  무려... "길거리 사방에 나가 지나가는 모든 이들을 초청하라!" 였습니다.   거리에 있는 아무나, 어느 누구나 들어오도록 초청되어진 것입니다.  종들은 나가서 누가 초대하는 지, 무슨 잔치인지를 알리고 사람들을  무작위로 초청합니다.  그런데, 당일이 되어 어떤 이들은 예복을 갖추어 입고, 어떤 이들은 그저 덜렁덜렁 입던 옷을 입고 옵니다.   그때에 왕은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다 내어쫓으라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못된 왕이 어디있습니까?  아무나 오라고 할땐 언제이고..... 그런데, 우리가 불평할 수 없는 이유가 그 비유의 끝에 나옵니다. "초대된 이들은 많으나 선택된 이는 적으니라."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왕의 잔치에 올 때에 왕의 초대에 자신들이 응답하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응답에 촛점을 맞추어 자신들이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왔습니다.  그러나, 왕은 사람들에게 매정하게 말합니다.  너희들의 응답으로 이곳에 온줄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선택"으로 이 연회장을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된 기준은 모든 사람들이 아닌, 예복을 입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칼빈주의자의 말도 맞고 웨슬리안의 말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예수이름을 부르는 자는"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응답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여기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여긴다는 말은 이 땅에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복을 잘 준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칼빈이나 웨슬리나 모두 이 땅에서 구원받은 자의 삶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칼빈이 단순하게 선택과 유기로만 구원론을 이해했다면 그가 굳이 제네바시의 시장까지 되어가면서 거룩과 성결운동에 한평생을 바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응답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성화의 교리가 그 구원론의 중심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정의 교리의 유용성은 우리를 낙심케 하거나 방종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더욱 정절있게 하고 하나님 앞에 더욱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는데에 더 큰 유용성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예정에 대해 말할 때에는 회고적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성경은 실제로 전망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이미 믿음을 가진 자기 자신을 회고하면서 태초부터 예정하신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인 예정을 다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는지 혹은 유기되었는지를 알기위해 애쓰는 것은 인간의 교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고 우리는 그 분이 주시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누리면 된다."

 

  오늘도 주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함으로 누리며 살고, 성도의 삶으로서 거룩과 성결의 예복을 준비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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