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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국민일보 이용희 교수 간증 52024-02-02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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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대 한 달 앞두고 부대교회 건축 시작했지만…

민간모금 중지로 예배당 크기도 축소… 교회는 돈 아닌 기도로 지음을 깨달아

입력 2015-09-03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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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와 군목, 김태구 백골부대 제3대대장 부부, 후임 군종(앞줄 왼쪽부터)이 1983년 9월 3일 군대교회 헌당예배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83년 6월 초 ‘말년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는데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부대 내에선 내가 교회건축을 위해 민간인들에게 모금 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상급부대에서 주의를 줬다. “허가 없이 민간교회 지원으로 대대교회를 지을 수 없음.” 

건축계획을 대폭 수정했다. 아쉽지만 이미 모금한 건축헌금은 다시 돌려줬다. 영락교회 여전도회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여전도회 회장님은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좋습니다. 건축헌금은 도울 수 없어도 건축 후 예배당에 필요한 강대상, 장의자 등 모든 비품을 후원하겠습니다. 끝까지 승리하세요. 이 병장!”

교회가 아닌 친지들로부터 후원받은 돈만 건축헌금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건축규모도 변경했다. 원래는 기존 예배당을 허물고 200명 이상 들어가는 예배당을 지으려 했다. 그러나 현재 있는 건물을 보수하고 증축하는 형식으로 바꿨다. 예배당 한쪽 벽을 헐고 길게 확장해 40명 들어가던 공간을 150명이 들어가는 공간으로 만들기로 했다. 안타깝고 억울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해 6월 중순 드디어 교회건축이 시작됐다. 대대 내에서 건축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중대·소대 군종들이 중심이 돼 직접 땅을 파고, 콘크리트를 부었다. 벽돌을 정성스럽게 쌓기 시작했다. 혹시 공사 기간이 길어지면 대대장님께 누가 될까 봐 최대한 신속하게 마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건축자재였다. 자재가 제때 도착해야 건축이 중단되지 않고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필요한 자재들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손을 놓고 자재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자재가 도착하지 않으면 올 때까지 금식하며 기도했다. 

놀랍게도 금식기도를 시작하면 여러 사정으로 오지 못했던 자재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단됐던 건축이 재개됐다. 어떤 때는 3일을 금식기도하고 난 후에야 기다렸던 자재가 도착했다. 

나는 이 일을 통해서 귀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교회는 돈으로 짓는 게 아니라 기도로 짓는 것이구나.’ 예전에는 돈만 준비되면 교회건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교회는 성도들의 믿음과 기도로 짓는 하나님의 집이다.’ 지금도 많은 교회를 바라볼 때 ‘저 교회를 짓기 위해 담임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얼마나 많은 기도와 헌신으로 수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금식기도를 하면서 교회건축을 감독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군대교회 건축의 어려움을 아는 많은 분이 후방에서 뜨겁게 기도해 주었다. 7월 5일이 전역 예정일이었다. 그러나 공사는 아직도 한참 남아 있었다. 후임으로 온 신병 대대군종에게 건축 총감독을 넘긴다는 것은 무리였다. 고민하다가 제대 후 서울에 가서 예비군 신고를 하고 다시 부대로 복귀하기로 했다. 

전역을 앞두고 백골부대 전역자 송별회에서 내가 대표로 답사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백골부대에 첫발을 디뎠던 신병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2년3개월이 지나갔다. 대학에서 교련을 배웠기 때문에 6개월 복무 기간 단축 혜택을 받았다. “군기가 세고 훈련의 강도가 센 백골부대! 군 복무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축복이었고 이를 통해 늠름한 대한의 남아가 됐습니다.” 

전역 후 서울로 와서 전역자 신고를 마쳤다. 그리고 곧바로 강원도 철원으로 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예비군복을 입고 부대 정문에 들어서니 많은 후배 병사들이 반갑게 맞아줬다. 도착하자마자 교회건축 현장으로 뛰어갔다. 

 (15) 첫 취업면접서 “일요일도 일할 수 있나” 질문에…

당장 취업해 부모님 모셔야 했지만… 주일성수 못하는 직장은 제외하기로

입력 2015-09-04 00:55 수정 2015-09-04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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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뒷줄 가운데)가 1984년 8월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졸업식에서 부모(이 대표의 왼쪽),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후배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군대교회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내부공사만 남은 상태에서 후임 군종들에게 남은 공정을 부탁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며칠 후 공사를 마쳤다는 연락이 왔다. 서울 영락교회 여전도회에 건축 상황을 보고했다. 약속대로 강대상과 장의자 일체를 준비해 1983년 9월 3일 헌당예배 때 오셨다. 주변에서 필요한 비품도 지원해 주셨다. 헌당예배 때 이런 기도가 절로 나왔다.  

“주님, 추운 겨울에도 따뜻하게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당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더 좋은 예배당을 짓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 성전을 넘나드는 장병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해주세요.”

군복무를 마치고 곧바로 가을학기에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로 복학했다. 나는 원래 정치·경제와 경제정책에 관심이 많았다. 81년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지만 재학 중에 정치외교학을 복수전공했기 때문에 졸업 후 정외과에서 2학기를 공부하면 정치외교학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제대 후 첫 학기는 매우 힘들었다. 제대 말년에 군대교회 건축으로 체력은 소진되어 있었고 장학금을 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최전방에서 2년3개월 동안 거의 책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다시 공부를 하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콜록콜록.” 무리하게 공부를 한 탓인지 학기말고사를 앞두고 기침이 시작됐다. 그런데 기침이 그치지 않았다. 상태가 점점 심각해져 큰형이 레지던트로 있는 국립의료원에 갔다. 결핵성 급성폐렴이라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학기말고사를 제대로 치르지도 못했다. 겨우 추가 시험을 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큰형이 한 달 동안 매일 주사를 놔줬다. 결핵약은 1년 넘게 먹어야 했다. 빠르게 회복됐고 겨울방학에는 농촌 전도를 갈 수 있었다. 84년 8월 서강대 정외과 졸업이 눈앞에 다가왔다. 당시는 아버지가 은퇴하신 뒤라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레지던트였던 큰형과 작은형이 동시에 군 입대를 했다. 나는 유학을 꿈꾸고 있었지만 형들이 전역할 때까지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구직에 앞서 주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 ‘첫째, 주일성수할 수 있는 직장을 주십시오. 둘째, 8월 말까지 이화여대 다락방 모임에서 말씀 전하는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직장을 주십시오. 셋째, 전공과 영어 능력이 향상될 수 있는 직장을 주십시오. 넷째, 월급이 50만원 이상 되는 직장을 주십시오.’ 월급을 특별히 명시한 것은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원서를 낸 곳은 삼성전자였다.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면접에 들어갔다. 임원들이 내 서류를 훑어보더니 이런 질문을 던졌다. “기독교 활동을 많이 했던데 우리 회사에 온 뒤 만약 일요일에도 근무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네, 새벽예배를 드리고 와서 근무하겠습니다.” 

그러자 송곳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매주 일요일 근무하라고 하면 어찌 하겠습니까?” “그러면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옆에 있던 임원이 민망했던 것 같다. “뭘 이런 걸 가지고 꼬치꼬치 따지나?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자고.” 

면접장을 나오면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며칠 후 결과가 나왔다. 불합격일 줄 알았는데 합격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당시 대기업들이 그랬던 것처럼 삼성전자도 주일날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일성수는 기도제목 중 첫 번째였다. 거룩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직장은 제외 대상 1순위였다. 

(16) 마침내 4가지 기도제목에 딱 맞는 영국은행 합격

기도 응답 덕분에 영어면접서 술술… 휴가 이용 1년 두 차례 농촌전도까지

입력 2015-09-07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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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왼쪽 두 번째)가 1985년 10월 인도에 있는 그린드래이즈 영국은행 아시아 연수센터에서 연수를 받고 동료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두 번째로 원서를 낸 곳은 유한킴벌리였다. 기업이념이 마음에 들어 지원을 했는데 합격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면접 때 회사 상황을 보니 내가 기도했던 4가지 기도제목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곳도 입사를 포기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용희가 아직도 세상 물정을 몰라서 저 모양이야.” “이용희는 너무 교만해.” “자기 입맛에 딱 맞는 직장이 세상에 어디 있냐? 너 철들려면 한참 멀었다.” 누구는 면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대놓고 했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예비하신 직장을 기다렸다. 

세 번째로 원서를 낸 곳은 외국계 은행이었다. 우연히 영자신문을 보다가 그린드래이즈 영국은행 서울지점 구인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1명을 뽑는데 140명이 지원했다. 지원자 중에는 미국 MBA 학위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고 공인회계사도 있었다. 나는 영어에 능통하지 않고, 유학도 다녀오지 않았다. 공인회계사 같은 자격증도 없었다. 그런데 최종 면접까지 갔다.  

영어면접을 앞두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주님, 예상 질문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예상 질문 몇 개와 답변을 영어로 달달 외웠다. “이용희씨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영국인 총무부장과 지점장은 최종 면접 때 정확히 내가 외운 질문을 던졌다. 전율이 느껴졌다. 자신 있게 답했다. “오우! 엑설런트. 이용희씨는 영어를 참 잘하는 군요.” 영국인 지점장이 칭찬했다. 합격이었다.  

입사 후 지점장이 종종 말을 걸었다. 그런데 나는 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웃음으로 넘겼다. 지점장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이런 말을 했다. “이상하다. 면접 때는 영어를 참 잘 했는데….”

영국은행은 내가 기도한 4가지 기도제목에 딱 맞는 곳이었다. 서강대 경제학과와 정치외교학과에서 배운 것은 이론이었다. 은행은 실무 그 자체였다. 당시 은행은 지금처럼 전산화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전표 기입과 부기원리는 필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행원이라 전표를 잘못 기입해 야단맞기 일쑤였다.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했다. 은행에선 점심시간에 영국문화원에서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퇴근 후에는 부기학원과 무역실무학원에 다니도록 지원해줬다. 영국은행 아시아지역 연수센터가 있는 인도에서 4주간 수출입업무 연수도 받았다. 

지나고 보니 4가지 기도제목이 모두 이뤄졌다. 주일성수를 할 수 있었고, 이화여대 다락방 산돌 모임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각종 연수 등을 통해 전공과 영어실력이 향상되었고, 50만원이 넘는 월급도 받았다. “주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의 기도를 세밀하게 응답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특별히 감사했던 것은 은행에 다니면서도 여름과 겨울 두 차례 농촌전도를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기들은 1년에 3일 정도의 여름휴가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영국은행에서 휴가로 10일을 쓸 수 있었다. 그래서 5일씩 여름과 겨울 농촌전도를 다녀왔다.  

1986년 11월 2년여 간의 그린드래이즈 영국은행 서울지점 근무를 마치고 본격적인 유학준비에 들어갔다. 군의관이었던 큰형과 작은형이 제대하면서 집안의 경제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행에 근무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전공과 영어 외에도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의 중요성을 배웠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시스템 속에서 성도들이 더욱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한다는 성경말씀을 실감했다. 영국은행은 백골부대 못지않게 소중한 교훈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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