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용희 (1) ‘동성애와 영적전쟁’에서 ‘다윗’이 되기로 작정‘반대 언급하면 징역’ 법안에 망연 법무부선 “교인들만 반대” 답변뿐입력 2015-08-17 00:45
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가 2011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군대 내 동성애를 금지한 군형법의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하고 있다.에스더기도운동 제공 2015년 6월 28일은 한국교회가 역사상 최초로 동성애 반대 주일로 지킨 날이다. 이날 오후 2시30분부터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동성애조장 중단촉구 한국교회교단 연합예배·국민대회’가 열렸다. 서울광장에서 열린 동성애자들의 축제인 퀴어문화축제와 카퍼레이드를 막기 위한 연합집회였다.
성도들은 동성애 축제가 끝날 때까지 6시간 동안 꼼짝 않고 자리를 지켰다. 참석자들은 축제가 끝나고 동성애자들이 서울광장을 모두 떠날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영적전투가 다 끝날 때까지 초소를 지키는 충성된 군사들의 모습 같았다. 이 땅의 거룩함과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지키기 위해 두 손을 들고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며 이 민족을 지켜온 한국교회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갈수록 더 확대되고 치열해지는 동성애 관련 영적전쟁은 2007년부터 시작됐다. “이 교수님 이것 좀 읽어보세요.” 그해 10월 중순 한 장로님이 신문 기사를 잘라서 내게 주었다. 기사는 21가지 항목에 대한 차별금지법안이 입법예고 됐으며, 그 가운데는 동성애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었다. 법무부는 이미 법안을 입법예고 했으며 법적 절차에 따라 3주 동안 의견을 받고 있었다.
차별금지법안이 통과될 경우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 말을 하거나 교회 강단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말할 경우 최고 2년 이하의 징역,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었다. 실제로 캐나다 호주 영국 등의 국가에선 동성애에 대해 죄라고 말했다가 처벌된 사례가 많이 있었다.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주님,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주님!’
‘최선을 다해 법안 통과를 막아야 한다’는 위로부터 오는 막중한 부담을 피할 수 없었다. 며칠 뒤 이른 아침부터 법안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데 함께할 만한 교회 담임 목회자들을 방문했다. “법안이 통과되면 안 되겠군요. 기도하겠습니다.” 모두들 법안 통과를 반대했다. 그러나 실제로 법안을 온몸으로 막을 사람들은 찾을 수 없었다.
오후에 대학 연구실로 돌아와 법무부에 전화를 걸었다. 법무부 장관실로 전화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인권국장에게 전화했다. “차별금지법안은 이미 관계부처들과 협조가 된 상황입니다.” 법안 통과가 순리인 듯 사무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치밀어 오르는 의분을 억누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가정과 사회를 붕괴시키는 동성애법을 법무부가 앞장서서 입법화 한다면 법무부 인권국은 국민들의 지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교육자의 양심으로 이 일을 절대 묵과할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반대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법무부 인권정책과 서기관에게 전화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차별금지법안을 반대합니다.” 당시 서기관의 답변이 참 가관이었다. “당신도 교회 다닙니까? 교회 다니는 교인들만 반대합디다. 지난 3주 동안 동성애 조항에 대한 반대의견은 100개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 정도 수준이면 차별금지법안은 통과된다고 봐야죠.”
하나님을 조롱하고 저주하는 골리앗을 향해 물맷돌을 들고 뛰쳐나간 다윗의 이야기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견딜 수 없는 의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만약 법무부에서 차별금지법안을 통과시킨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지금부터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차별금지법안 저지를 위해 범국민적 반대운동을 전개할 것입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약력=1958년 서울 출생, 서강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워싱턴대학원 경제학 석사, 미국 예일대학원 국제개발경제학 석사, 영국 그린드래이즈은행 서울지점 근무, 유엔개발계획 내셔널컨설턴트, 현 에스더기도운동 대표, 가천대 교수, 바른교육교수연합 대표. (2) 외할머니의 40년 새벽기도 은혜로 싹튼 믿음독실한 어머니, 어려서 성경 들려주고 산상수훈 등 외우면 용돈 주시며 격려입력 2015-08-18 00:15
이용희 에스더운동본부 대표의 외할머니인 김성녀 권사(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1962년 충북 영동에서 환갑잔치 후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기도의 모범을 보여준 외할머니가 이 대표를 안고 있다. 나는 1958년 12월 28일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조흥은행에 근무하셨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결혼 전부터 예수님을 믿었으며, 2010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날까지 평생을 새벽기도자로 사셨다. 반면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하기 위해 교회에 나가셨다.
1940년대 말 결혼을 위해 아버지가 외갓집을 찾아갔다. “따님을 저에게 주시면 평생 행복하게 보살피겠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내 딸을 줄 수 있네.” “교회 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약속대로 아버지는 그때부터 교회에 출석하셨다.
신앙도 없었던 아버지는 종갓집 장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출석하면서 제사를 드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머니의 전도로 친가에 복음이 들어왔고 지금은 대부분의 친척들이 예수를 믿는다.
결혼 초 아버지는 억지로 교회에 다녔다. 어머니는 주일마다 아버지에게 교회 출석을 재촉하느라 무척 힘들어 하셨다. 그런데 1979년 장로가 된 후에는 상황이 역전됐다. 아버지는 주일 예배 때마다 어머니가 늦지 않도록 재촉하셨다.
아버지는 집사 때까지도 술, 담배를 하셨다. 중간에 술은 끊었지만 장로 피택 후 장로고시를 준비할 때까지도 담배를 끊지 못했다. 한 번은 장로고시를 준비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는지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용희야, 가서 담배 좀 사오너라. 교회 시험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그런데 1970년대 말 아버지는 장로 임직을 받은 후부터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담배를 완전히 끊으셨다.
우리 집안 신앙의 뿌리는 충북 영동 외갓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외할머니는 청상과부로 5남매를 힘들게 키우셨다. 셋째 딸이었던 어머니가 처녀 때 중병에 걸렸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차도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집 옆에 있던 구세군교회에서 교인들이 외할머니를 전도하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위해 좋다는 약을 써보고 절에도 가보고 무당굿도 했다. 아무런 효험이 없던 차에 예수를 믿으면 셋째 딸이 나을 수 있다는 말에 선뜻 응하셨다.
“셋째 딸만 살려주신다면 즉시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이날부터 구세군 교인들이 매일같이 찾아와서 가정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고 어머니는 깨끗하게 나았다. 어머니가 치유되자 외할머니는 셋째 딸을 데리고 이튿날부터 매일 구세군교회로 새벽기도를 다니셨다.
이렇게 시작된 외할머니의 새벽기도는 1981년 돌아가실 때까지 약 40년간 계속됐다. 기도는 갈수록 깊어졌고 새벽기도뿐 아니라 저녁식사 후에도 매일 교회에 가셔서 밤늦도록 자주색 방석을 깔고 앉아 교회 마룻바닥을 눈물로 적셨다. 결혼한 자녀와 배우자, 그리고 슬하에 23명의 손주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간절히 기도하셨는데, 후에는 증손주들 이름까지 부르면서 기도하셨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외할머니는 늘 새벽과 밤에 교회로 향하셨다. 외할머니가 밤늦도록 집에 안 오시면 내가 교회에 가서 외할머니를 직접 모시고 왔던 기억도 난다. 지금도 예배당에서 간절히 기도하시는 외할머니의 뒷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외할머니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신 어머니는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일반 동화 대신 성경 동화를 들으며 자랐다. 어머니의 무릎에서 신·구약 성경 이야기를 들으며 믿음을 키웠다. 어머니는 산상수훈, 사랑장, 시편 1편 등을 외우게 하셨고, 다 외우면 상으로 용돈을 주셨다. 부흥회나 신앙집회가 있으면 늘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주일 아침마다 헌금을 주셨는데 늘 빳빳한 새 돈을 쥐어 주셨다. (3) 어머니 통해 기도응답 체험·순종의 태도 배워가족들 철저하게 주일성수 시키고 중요한 일 있으면 금식기도로 간구입력 2015-08-19 00:30
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왼쪽)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68년 대전시 유성의 한 냇가에서 어머니, 셋째 형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1960년대 중반 주일학교는 오전 9시에 주일예배를 드리고, 점심식사 후 오후 3시쯤 어린이들을 위한 집회를 열었다. 나는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던 서울 신촌 대현교회에 출석했다.
오전 주일학교 예배와 달리 오후 집회에는 어린이들이 많이 모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오후에도 나를 꼭 교회로 보내셨다. 당시 선풍적 인기를 끌던 만화영화 ‘황금박쥐’가 흑백TV에서 나오던 때였다. 주일 오후 만화도 못 보고 억지로 교회에 가는 게 어린 나이에 무척이나 억울했다. 울면서 오후 집회에 간 적도 있다. “인생 참 불행하다. 황금박쥐도 못 보고 교회에 나가야 한다니….” 이렇게 투덜대곤 했다.
가족 중에 주일성수 문제로 어머니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파서 학교에 결석하고 직장을 결근하더라도 주일예배는 빠진 적이 없다. 어머니가 보여주신 신앙교육의 열매다.
새벽기도를 매일 다니셨던 어머니는 5남매가 입학시험을 볼 때마다, 집안에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금식기도를 하셨다. 내가 유학 중에 급한 일이나 중요한 일이 생기면 전화해서 “어머니, 기도해주세요”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꼭 금식기도를 하셨다.
고모가 우리 5남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 “너희 5남매가 입시에 실패하는 것을 거의 못 봤다. 너희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을 보면서 나도 교회에 나가게 됐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릴 때 살던 집에 우물이 있었는데 두레박질을 하다가 그만 줄을 놓치고 말았다. 아무리 해도 두레박을 건질 방법이 없었다.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데 어머니가 지나가시다 우리 앞에서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 저 두레박을 건져주십시오.” 그리고 어머니는 끈에 묶인 갈고리를 내리셨는데 한 번에 두레박을 건져내셨다. 조금 전까지 아무리 해도 안 나오던 두레박이었는데 말이다. 어린 나이에 ‘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런 어머니의 기도 응답들이 이것 말고도 내 기억에 수두룩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어머니로부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배웠다. 방학 때 충북 영동 외가에 놀러 갈 때면 어머니는 외할머니께 좋은 것을 싸서 보내셨다. 그러면 외할머니는 그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골라 교회 목사님께 보내셨는데, 그때마다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방학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면 외할머니가 음식을 싸 주셨다. 그것을 받은 어머니는 그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떼어 담임목사님께 보냈다. 그때도 막내인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집이 깨끗하고 좋은 음식을 준비하는 날은 어김없이 목사님이 심방을 오셨다. 유년시절부터 영적 권위를 지닌 목회자를 전심으로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어머니는 말이 아닌 삶으로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는 장로였고, 큰형도 훗날 같은 교회 장로가 됐다. 그런데 교회 문제로 의견이 엇갈리면 어머니는 남편이나 아들 편을 들지 않고 담임목사님을 지지했다. 어머니는 늘 ‘목회자의 결정이 성경에 명백히 어긋나지 않는 한 권위에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어머니를 통해 영적 지도자에 대한 순종, 존중의 태도를 배웠다.
또 어머니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자신이 하지 않고 아버지가 결정하시도록 배려했다. 그래서 우리 5남매는 ‘가장에 대한 복종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웠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어머니는 반드시 기도를 하셨고 결정은 아버지가 하시도록 했다.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5년 전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신 어머니가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 권위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보여주셨던 분임을 깨닫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