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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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홍보라자매 천국환송예배)2024-02-05 01:02
작성자 Level 10
설교일2015-05-09
성경구절요한일서 4장 16-18절

(요일 4:16)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7)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요일 4: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실 장례설교를 무엇을 해야 하나 이렇게 고민해 본적도 없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을 위해 천국환송예배를 드려본 것도 처음인데다, 제가 결혼주례를 했었는데, 천국환송예배를 위한 설교를 준비하려니 무엇을 해야할지 마음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거의 한달전에  자매가 울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보라언니는 저렇게 아픈 이유가 뭔가요? 나쁜 사람도  사는데,  보라 언니가 아픈가요? 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아무리 말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우리와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톨스토이’입니다. 그는 신앙을 저버리고 방황하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을 만난 분입니다. 그분의 소설에는 그럼으로 삶의 밑바닥 이야기부터, 더러운 인간의 내면,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없는 이야기들을 소설로 풀어 놓았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단편 모음집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가엘 천사에게 지상에 내려가 어떤 여인의 영혼을 데리고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까닭에 미가엘은 서둘러  여인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집에 도착했을  미가엘은 너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인은 하루 전에 쌍둥이 딸을 낳았는데 너무나 탈진한 상태여서 어린것들에게 젖도 먹이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처절한 상황가운데 하나님이  여인을 데리고 오라는 말씀에 미가엘은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없듯이 말입니다.

 

여인은 자기 영혼을 데리러  천사를 보자 애원을 했습니다. " 천사님,  남편은 며칠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친척이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 나를 데리고 가면  핏덩이들을 누가 키워주겠습니까?" 딱한 사정을 들은 미가엘은 그만 빈손으로 하늘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도저히  딱한 여인의 영혼을 데리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아마  미가엘의 행동에 모두 동의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다시 내려 가라. 그리고  여인의 영혼을 데리고 오라." 미가엘은 어쩔  없이 다시 내려와 여인의 영혼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미가엘은  일로 인해 금빛 날개를 잃고 지상으로 추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상으로 추방되는 미가엘 에게  가지 문제를 풀어야 돌아올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인간의 가슴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 인간이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셋째,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세상으로 추방된 미가엘은 벌거벗은 몸으로 추위에 떨며 골목에  있었습니다. 이때 거리를 지나가던 구둣방을 하는 시몬이라는 사람이 불쌍한 미가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그를 자신의 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입니다. 너무나 가난한 형편이기에 시몬의 아내는 미가엘을 데려오는 것을 동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힘든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가엘을 보니 너무 불쌍해서, 도저히 남을 도와   없는 형편인데도 가족처럼 대해 주었습니다. 그제야 미가엘은  번째 문제 '인간의 가슴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해답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가슴에는 사랑이 있다.' 것입니다. 저희는 보라자매가 한국에서 돌아온 후부터 여전도회원들이 돌아가면서 두달 반정도를 오일씩 갔었습니다.  형편이 안되는 분들도 있었고, 가서 환자를 돌보는 것이 그렇게 익숙하지 못한 분들도 계셨습니다. 서로 말이 안되서 힘들어 하면서도 그렇게 하셨던 이유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가엘은 그렇게 구두를 수선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부자  사람이 구두를 맞추려고 왔습니다. 부자는 거만하고 오만하게 발을 얹어 놓으면서 말했습니다. "1년을 신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게 만들어라" 미가엘은 사나이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뒤에 죽음의 사자가 오늘밤에 그를 데리고 가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는 일년동안이나 튼튼하게 만들 신을 만들라고 했지만 마가엘은 조용히 그가 관에 들어갈  신을 슬리퍼를 만들었습니다. 그제야 둘째 문제, '인간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가?' 풀었습니다. 인간이 언제 죽을지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지만 내일 일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례를 하면서  신부가 저보다 먼저 죽는 것을 상상도 해본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저렇게 아프다가 나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우리가  모르는 것은 내일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어언 세월이 6년이 지났습니다.  시몬의 구두방은 더욱 유명해 져서 다른 도시의 사람들까지 찾아와 구두를 맞추어 갔습니다. 어느날 마차를  귀부인이 여섯살 정도의 쌍둥이 여자 아이를 데리고 시몬의 구두방을 찾아 옵니다. 쌍둥이중에  아이는 다리를 절고 있었는데 귀부인은 특별히  작은발에  맞추어서 아픈 다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시몬이 어떻게해서 다리를 절게 되었느냐고 묻자 귀부인은 아이 엄마가 죽을  아이의 한쪽 다리를 깔고 죽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아버지 어머니가 며칠 사이로 죽어 버린 불쌍한 쌍둥이 여자 아이를 자기가 데려다 기르면서 얼마나 많은 기쁨과 행복을 느꼈는지 끊임없이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짐작했듯이 쌍둥이 여자 아이들은 6년전 미가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살려 주려고 했다가 다시 데리고  여자의 딸들이었습니다.

 마을에 부자 여인이 살았는데 자기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죽어서 슬픔에 잠겨 있을  쌍둥이 여자 아이의 소식을 듣고 자기 아이를 대신해서 기른 것입니다.

 광경을 보면서 미가엘은 마지막 진리,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하늘로 돌아  때가 되었다고 시몬과 그의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미가엘이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요.

" 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위한 걱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배웠읍니다.

천사인 제가 사람이 되었을  저는 지나가는 사람이 베푼 사랑 때문에   있었읍니다.

쌍둥이 고아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했던 낯선 여자의 사랑 때문에   있었읍니다.

어떤 사람도 저녁이   자신의 육신을 위한 장화가 필요할 것인지, 시신을 위한 실내화가 필요할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쌍둥이의 어머니도 자기가 죽으면 아이들도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읍니다. 비록 사람들이  걱정 속에서 내일을 모르고 사는  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불쌍하게 보는 사랑이 있고, 사랑에 의해서만 산다는 것을 이제 이해했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 또한  사람 안에 있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남았습니다. 젊은 남편도 남았습니다. 가족도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홍보라 집사를 데려가면서 하나님이 믿으시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이땅에 저들을 위해 사랑을 남겨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데리고 가셨는지를 묻기 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의무는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잊혀질 것입니다. 저는 보라집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 아침과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아무생각없이 강명관 선교사와 저녁을 먹는 저를 발견하고는 너무 한심해서 그날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습니다. 이젠 죽음 앞에 무감각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밥을 안먹으면 사랑이 있는 것이고, 밥을 먹으면 사랑이 없는것도 아닙니다.

 

더큰 것은 그것보다 더한 것입니다. 이제 부터 남은 사람들은 더큰 사랑으로 견디어야  것입니다. 주애가 다애가 어떻게 살아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희 교회 유년주일학교 전도사님이신 양해나 전도사님은 주애 나이때 엄마를 잃었습니다. 양전도사님의 삶은 말할  없을 정도로 힘들고 곤고했습니다. 인문계 학교를 가지 않고 상업고등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엄마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은혜받고 배를 타고 다녔습니다. 한번도 제대로 돈을 내고 학교를 다녀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교회 교역자중에 유일한 박사님이십니다. 치유를 먼저 받은 상처자로 누구보다 주애와 다애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지금도 양해나 전도사님이 사셨던 곳에서 엄마없이 자라야 했던 전도사님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것을 예상한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상업고등학교를 다닌 본인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톨스토이의 말처럼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주애가, 다애가 어떻게 자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변에 저들을 더큰 사랑으로 섬겨줄 사람들을 하나님은 붙여줄 것입니다.

 

보라집사의 상태가  안좋아질때, 여전도회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더이상 전문 간호를 해보지 못한 회원들이 보라자매를 돌보는 것은 안된다는 결정이었습니다.  결정을 하고 여전도회 회장님부터 너무 많은 분들이 본인들이 무엇을 잘못한 것이 아닌가 고민하고 아파했었습니다.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들어들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것을 내려 놓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보라자매를  많은 사람들이  수도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안에 있는 많은 의문들을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아마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잊을 것입니다. 제가 배고프다고 밥을 먹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랄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은 아이들의 모습이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이 아닐  있습니다. 그때도 두손을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홍성수 집사에게 등을 두드리는 일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천국환송예배에 가져야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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