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봉 집사 졸업연주회를 마치고
김성봉 집사의 졸업연주회를 마치고 돌아와 이러저러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참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오릅니다.
1999년은 참으로 정신이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주임간사로 있으면서 학생부 전도사를 병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던 것은 물론 새벽에 나가 밤에 돌아오는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힘들었느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펄펄 날았습니다. 행복했고 감사했던 이유는 젊은이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월요일 서울대를 가서 성악과 학생모임을 지도했고, 목요일에는 연대와 이대 성악과 학생을 지도했었습니다. 서울대 모임은 당시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초창기 모임이라 모이면 고작 10여명이 모였고, 여름에는 중국문화교류가 잡혀 있었습니다. 기도하면서 30명을 목표로 움직이는데, 거의 숫자가 채워졌을 때였습니다. 임원단이 꼭 데리고 가고 싶은 형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김성봉집사였습니다. 타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노래가 좋아서 서울대에 신입생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일단은 안됐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성악과 군기(?)는 나이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첫만남은 선한 인상에 안되보일 정도로 마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믿었던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서 대학가서 신앙을 잃어버렸던 늦다리 신입생은 중국선교를 같이 감으로서 찬양선교단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성악과에서는 착한 것은 노래를 잘하는 것이 착한 것이고, 노래를 못하면 성품과 상관없이 악한 사람입니다. 참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갓 20살난 아이들과 27살난 김집사가 같은 일학년을 다닌다는 것 자체가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쉽지 않은 시기에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준간사를 만나기 전까지 말입니다.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들을 했었습니다. 확실히 남자는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준간사를 만난 그때부터 김집사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가 몸무게의 변화였습니다. 얼굴에 살이오르기 시작했고,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목소리는 환경에 민감합니다. 자신감이 붙자 그전에 가졌던 참으로 좋은 목소리에 빛깔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성악하는 학생들 말대로 목소리에 기름칠이 칠해진 것입니다. USC 대학원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을 했고, LA 오페라단에 들어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6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지휘는 이 지역에서는 가장 잘하는 분입니다. 듣는 귀가 분명히 있을 뿐만 아니라, 노래를 하기 위하여 고민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성가대원들을 가르칠 때보면 어떻게 소리를 내야 하는지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제 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김성봉 집사가 늘 새로운 선택을 할 때 같이 하셨던 하나님이 그의 앞길에 같이 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