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 황해도라고 합니다. 곡창지대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황해도 안악출신입니다. 어머니는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백범 김구선생의 고향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향의 이야기를 할때면 참 생생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피난 오실때의 이야기, 할머니 이야기....
어머니에게서 외할아버지 이야기는 별로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일찍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릴 때 꽤 잘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위로 계셨던 오빠가 지금은 당뇨병으로 고생하지만 극작가로 꽤나 이름을 날렸던 분입니다
그런 외삼촌이 어느날 목사집에 와서 “사는게 이게 뭐니?” 라는 말씀 하나에 자존심 강한 우리 어머니, 외삼촌과 거의 왕래를 안하셨습니다. 60년대 외제차를 몰고 다니던 삼촌과 우리집의 차이는 그렇게 컸습니다. 친오빠에게도 아무리 어려워도 돈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내게 보인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자랐습니다. 어느날 외삼촌 댁에 갔다가 별천지에 온것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는게 달랐고, 입고 있는 옷들이 달랐습니다. 엄마를 닮아서 그랬나요. 그날 이후로 저도 한번도 그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왠지 모를 위압감,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의 자존심은 이북에서 내려온 부모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굶는 한이 있어도 교인들에게 그런 소리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원래 돈이야기를 하지 않는 분이셨지만, 어머니는 그 아버지보다 더 자존심이 강하셨습니다.
두분이 싸우시면 나중에 보면 꼭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나가라 하면(왜 옛날 남편들은 아내에게 나가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럼 어머니는 두말 안하시고 바로 보따리 싸시고 집을 나섰습니다. 엄마가 어디간줄 아는 아버지! 금방 쫓아가서 어머니 모시고 오는 길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도 굽힐 줄 모르셨습니다.
어머니는 제 앞에서 세 번 우셨습니다. 평생 우리 엄마가 우는 것은 기도하실 때 뿐이었는데, 세 번 그렇게 우셨는데 모두 저와 이별할 때 였습니다.
첫 번째는 제가 군대갈때입니다. 갑자기 나온 영장! 다른 어머니들은 놀란 가슴으로 말씀하실텐데 잘 다녀와라 그 말씀이 다였습니다. 저도 엄마가 내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기에 엄마는 울지 않을 것이다 생각했습니다. 도리어 제가 울었지요. 그런데, 제가 차를 타고 떠나는데 엄마가 아버지품에서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들 군대 갈때도 자식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시는 독한 어머니!
그 어머니가 저 장가갈 때 그렇게 우셔서 아내쪽 손님들이 모두 걱정을 했답니다. 시어머니 될사람이 저렇게 우니 하고 말입니다. 저를 장가보내시기 위하여 어머니는 손에 낀 반지를 파셨습니다. 미국에 있던 누나가 보내준 반지였습니다. 그런가 봅니다. 딸은 엄마에 대한 마음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엄마는 아들 결혼식에 그렇게 우셨는데 저는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아직도 여쭙지 못한 것이 결혼식에서 왜 우셨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미국으로 떠날 때.....
지금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자존심을 세우십니다. 한번도 저에게 사는 것이 어렵다는 표현을 안하십니다. 그리고 그건 제 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물으면 괜찮다입니다. 너무 고마운 것은 교인들이 한국에 들리셨을 때 저의 부모님을 보시고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행복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모님들이 겪는 고통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아들이 목회하는 교회 교인들이 오시면 대접하고 싶어합니다. 미국에서 목회하는 자식에게 부담이 안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저희 부모님의 아직도 남아있는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가실려면 대접받겠다는 생각으로 가십시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사랑을 받으면 미안해 하시고 저에게도 미안해 하십니다. 그런데, 이젠 이나마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점점 더 기력이 떨어지시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자존심은 주님이 부르실 때 무너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