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에 시편 142편을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142편과 57편은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서 도망갔던 아둘람 굴에서 쓴 시로 알려졌습니다. 사무엘상에는 그 아둘람굴에 대략 40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면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사무엘상 22장 1, 2절)
아둘람굴에 숨어있는 다윗은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면 안되는 위치였습니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오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분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낙오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옵니다.
용사가 와도 시원치 않은 판에, 더 이상 건강한 공동체에서 살지못하고 떨어져 나간 낙오자들이 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동굴속으로 찾아왔겠습니까?
다윗은 그들은 나가라지 않고 그들을 받아주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동굴속에서 싸움도 일어났을 것이고, 먹을 것이 없다보니 싸나운 일도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들을 품었기에 그들은 훗날 다윗이 왕이 될 때 그에게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를 좋아합니다. 물론 소설인지라 그렇게 묘사할 수도 있습니다. 유비가 조조의 공격에 형주를 버리고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때 제갈공명이 “빨리 도망가 다음을 기약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유비는 자신을 따라 피난을 시작한 백성들을 두고 빨리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속도를 맞추다 보니 적군을 피해서 도망가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유비가 한 고백은 같이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판교에서 홀로 적군을 맞는 장비의 이야기나, 유비의 유복자 아두를 구하기 위하여 홀로 달렸던 조자룡의 아름다운 무공담은 그때다 만들어 졌습니다. 그 일로 유비는 땅을 잃었지만 사람을 얻었습니다. 유비는 국민을 최고의 국가로 보았습니다.
교회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교회를 가리켜 피난처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죄인들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인가 우리가 죄인인 것을 망각하고 우리도 어느새 바리새인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죄인인 바리새인이 세리와 죄인들을 보면서 손가락질 하듯이 어느새 교회에도 그런 모습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안고가는 목회라는 조금은 거창한 타이틀로 목회했는데 감사하게도 13년 동안 한번도 이민교회에서 일어난다는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같이 계셨던 분들이 그렇게 오셨던 분들을 잘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신 분들도 아둘람굴인지도 모르고 오신 너무나 귀한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수요일 설교가 끝나고 아내랑 걷는데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품을 수 없다. 아둘람굴을 운영하려면 당신이 강해야 하는데 당신은 그렇지 못하다.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사람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당신이 품을 만큼 건강해 지던지.......”
맞습니다. 제가 건강하지 않으면 삐지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운동하기로 했습니다.
본훼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굳이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만납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둘람굴 이어야 하는 이유를 굳이 하나 들자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