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끝자락에 내가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한바탕 난리를 치루었던 시대는 1980년대였습니다. 군사독재시절, 젊은 신학도들은 남미의 ‘해방신학’을 받아들였습니다. 교회가 사회에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자 일어난 현상입니다. 해방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달려들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신학생들은 해방신학의 진정한 의미도 모른채 달려들었습니다. 당시 해방신학을 하는 신학생들은 술마시고, 담배피고, 데모를 했습니다. 탈교리화, 신학의 사회화---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것에 이론적인 토대였습니다. 사실 남미의 캐톨릭신학이었지요. 그런데, 아쉬운 점은 사회적 참여를 앞장세우다 보니 신앙의 본질을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청년부 예배가 끝나면 막걸리들고 산에 올라가 전도사님과 술마시고 애국가 4절까지 20번 정도 부르면 새벽이 왔습니다. 그러면 집에가서 두어시간 자고 술냄새 품기며 성가대에 섰던 기억이 납니다.
저에게 80년대 교회는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지금은 제 목회의 멘토인 장달윤 목사님이시지만 당시는 전도사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속화된 목사라고 치부했습니다. 당시 전도사님들은 제게 “이 사회를,교회를 뒤집어야 예수의 세상이 온다”고 가르쳤습니다. 멋있어 보였습니다.
청량리에서 ‘밥퍼’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의 다일공동체에 친구들과 후원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습니다. 열심히 돈을 모아 가난한 행려병자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오웅진 신부가 세운 ‘꽃동네’를 기웃거린 것도 그때입니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오래가지를 못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정작 그분들의 영향권인 교회에서 본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영향력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사회를 이끌었던 정신은 기독교였습니다. 이청준을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의 글에 기독교적인 요소가 없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를 이끈 캠퍼스 학생운동이 불꽃처럼 일어났던 것도 그 시대입니다. 베스트 셀러에 심심치 않게 기독교책들이 올라갔었습니다.
얼마전에 서점에 들려서 요즘 잘 팔리는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서점주인이 대뜸 권면한 책들은 모두 스님들의 책이었습니다. 종교서적이 아닌 일반서적으로 스님들의 책이 그렇게 잘팔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두개 집어 읽어 보았습니다. 혜민스님! 그의 엄청난 학벌과 뛰어난 외모, 사실 그정도 학벌과 외모를 가진 목사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목사님들의 책을 인문학책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일반인들이 보고 공감할 수 있는 책이 없습니다. 아니 사실은 많이 있는데, 사람들이 읽지를 않는 것입니다.
20여년 만에 완전히 뒤집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인들 스스로는 잘잘고 행복하기를 원하면서 종교는 더 낮아지기를 원합니다. 얼마전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10억을 주고 1년감옥갈 사람 했더니 무려 44%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44%가 아니고 훨씬 더 높을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할 기독교인은 또 얼마나 많을지---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사회에 교회가 가져다 준 번영신학이 하늘높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추락하기 시작하는데 너무 속도가 빨라 정신을 못 차리겠습니다. 그런데, 추락하는 끝자락에 내가 있습니다. 교회의 아픔에 같이 아파해야지 나는 아닐 것이다 생각하고 쉽게 이야기 했던 모습 때문에 오늘은 더 아파옵니다. 내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나도 끼어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