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어느 가을의 이야기
1997년 10월의 어느 토요일에 식사 초대가 있었습니다. 교육전도사로 일하고 있을때였는데, 모든 교역자들, 그리고 장로님들, 권사님들이 모두 초대가 되는 자리였습니다. 뷔페로서는 당시 대단히 비싼 워커힐에서의 식사였습니다. 그런데, 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토요일 저녁은 학교다니며, 선교단체 섬기며 교회일까지 하는 사람으로서는 워커힐까지 가서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 참 고약한 것이었습니다. 입이 대발이 나와서 안가면 안되겠느냐고 부목사님에게 물었더니 무조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30여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초대한 분이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한 10분을 기다리다가 담임 목사님이 일이 있어서 늦으신다고 하니 우리끼리 식사를 먼저 하시랍니다. 그래서 식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입이 두배나 나오게 되었습니다. 툴툴 거리면서 식사를 합니다. 식사를 초대한 분은 음식을 다먹을 때까지 오지 않으셨습니다.
식사를 마친후 목사님이 일어나셨습니다. 대신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이 제가 교회를 섬긴지 20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제 환갑인 날입니다. 부족한 사람 열심히 섬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목사님의 인사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즐거워들 하셨는데, 저는 속에서 부글부글 참지를 못하겠는 것입니다. 다음날 당회장실로 쫓아 올라가서 따졌습니다. “꼭 그렇게 사람을 민망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러면 마음이 편하십니까?” 그때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잊지를 못하겠습니다. “나 정말 고마워서 그래. 나같은 사람 20년 동안 봐줘서 그래” . 눈물이 났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생각하니 목사는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무에게도 알리지를 않으셨습니다. 교인들 불편할까봐 그러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주보에 올린 어머니에 대한 글은 교인들로 하여금 머리를 숙연하게 만들었지만 저는 그렇게 서러웠습니다.
아버지같은 분, 저에게 목회를 가르쳐 주신 어른은 목사의 처신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날 저와 나눈 대화 내용이 기독교신문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올라온 글에 반응이 상반되었습니다. 참 잘했다. 목사의 자존심을 세웠다. 장달윤 목사 훌륭하다 라고 이야기 하신 분들도 있었지만 어느 분은 “오죽 교인들이 그랬으면 그랬겠어” - 누구는 존경한다고 하고 누구는 오죽 했으면 이라고 말을 합니다. 무엇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유난히 목사님이 그리워 집니다. 목사님과 하루종일 목회 이야기 하면서 보내면 참 좋을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