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이 넘으면서 이젠 철든 모습을 보이겠다고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어머니’라고 불렀던 적이 있지요? 저는 엄마가 왜 삼일동안 저에게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셨는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후에 엄마가 어머니라는 단어의 낯설음 때문에 그런 것을 알고 제가 어머니라는 단어를 엄마에게 쓴 것은 46년 세월에 단 삼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엄마 저는 지금도 엄마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어릴 적에 엄마가 좀 부드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 엄마는 왜 저렇게 강할까? 그런데, 살다보니 알겠습니다. 엄마가 강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모진 세월 오남매 키우기가 어려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눈물을 보이시지 않았던 엄마! 남들 다 풍로에 밥하실 때, 큰 쇠난로 한 부분을 깨고 나무떼다가 서울 한복판에서 나무때며 밥을 하시고 국을 만들어 먹이신 엄마의 모습을 너무나 부끄러워서, 언제가 몰래 엄마의 가장 소중한 그 깨진 쇠난로를 엿장수에게 팔았었지요. 결국 고물상까지 가셔서 그것 도로 찾아오시고 혼내셨던 그날, 나 정말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울었던 것이 이제 35년 전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피난 나오셔서 가난한 목사집에서 그렇게 사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이제야 이해합니다. 왜 남들 엄마들은 라면을 꼬들꼬들하게 끓이는데, 왜 우리 엄마는 라면이 늘 풀어질까 생각했습니다. 일곱식구 먹이는데 라면 5개로 먹이시기 위해서 풀어질때까지 기다리신 것을 훗날 알았습니다. 평생 이북에서 내려오셔서 집한칸 없이 사실 것 같더니, 번듯하게 집을 졌습니다. 그리고 우아하게 쇼파갔다놓고 커피한잔 하고 싶으시다는 그 거실 너무나 크고 좋아보이던 그 곳이 지금 생각해 보니 22평 싸이즈입니다. 그래도 참 감사하지요. 그 집에서 사신지 벌써 30년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이라 불리웠던 그 집이 오남매 모두 살고 지금도 엄마와 아버지가 사시는 집이 되었습니다. 무릎 아프신데, 이층 올라다니시는것 불편한 것 같아,지난 번 한국 갔을때 아파트로 옮겨드릴려고 했었습니다. 동생들과 의논도 하고---- 엄마가 자식들 도움 안받고 사시려고 그집에서 나오는 세 100만원 때문에 그 집에 계속해서 머무려고 하시는 마음을 안후 제가 목사된 것을 후회했었습니다. 너무 감사하게도 그런 마음을 잘 이해하는 동생들이 있어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얼마전에 엄마를 뵌 교우가 “그래도 참 행복한 가정입니다. 부모님 행복해하십니다”라고 말씀하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엄마! 오래 사셔야 하는 것 아시죠? 효도 하려고가 아니고 난 아직도 엄마의 기도가 더 필요하니까,아직도 멀었으니까 그러니 엄마 오래사세요. 사랑하는 맏아들 김인철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