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때, 성경을 한절씩 암송해서 발표했습니다. 물론 목사 아들인 저에게 가장 유명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 그것을 시켰는데 외우지 못해서, 가장 짧은 누가복음 2장 8절 말씀인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를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누나가 저를 놀리고 싶을 땐 그 이야기를 합니다. 저와 유전적 피가 비슷하게 흐르는 예준이가 선물받기 위해서 열심히 반복하여 암송하는 모습을 보면서 훗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되어 집니다.그땐 숙제를 한번도 해가 보지도 않았습니다. 숙제를 안해가면 선생님이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으로 저와 옆 짝꿍의 머리를 한번씩 쥐어 박았는데 서로 머리를 감싸며 웃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에 형과 누나들이 분주하게 움직일때 교회 가운데 있던 톱밥난로가 생각이 납니다. 톱밥난로가 참 따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겼습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 유일하게 통행금지가 없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학생회는 늘 모여서 밤새 놀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없는 것을 가지고도 왜 그렇게 즐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선물을 나누고,내 선물이 관심있는 그자매에게 가기를 그렇게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 용걸이형....
라면 박스만한 곳에 선물을 넣었습니다.라면박스안에 좀더 작은 박스, 얼마나 정성스럽게 포장을 했는지, 저 박스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맨 마지막 박스를 열었을 때 있었던 껌 하나....
그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준 형이 20대에 불치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이름입니다.
중학교 2학년때는 장충단에서 장안동까지 걸어왔습니다. 그 추운 25일 새벽에 그렇게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밤을 지새워도 같이 있을 친구들, 같이 걸어도 서로 격려할 수 있었던 사람들, 중현, 창덕,재철, 기상,재득, 선미, 영숙,미자, 은성, 은미...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두 오래전 일들이라 찾기도 어렵습니다.
그렇게 걸어와서는 폼잡고 11시 예배에 들어갑니다(한국교회는 늘 25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축도할때까지 잠들어 있던 날들, 그랬습니다. 늘 밤을 새웠기에 25일은 낮에 잠밖에 잔 기억이 없습니다. 아마 크리스마스는 기다림의 시간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설렘이 있었습니다. 사춘기 소년의 마음에는 첫사랑이 시작될 지도 모른다는 떨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83년 겨울이 되었을때 처음으로 우리 집사람을 만났습니다. 벌써 31년 전의 일입니다. 고등부 회장일때 갓 중학교 1학년으로 들어온 아이였습니다. 그때도 피아노를 잘 쳐서 크리스마스 연습을 할때 같이 시간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그때 그 꼬마가 아내가 될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때는 통행금지가 해제가 된 상태인지라, 이미 우리 어른들이 기억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추억은 사라지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가장 추억에 남는 크리스마스 이브는 1996년입니다.
반지하에 살고 있는 우리집 앞에 갑자기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졌습니다. 연대,이대 성악과 녀석들이 깜짝 반문해서 골목길에서 풀 보이스로 캐롤를 부른 것입니다. 동네가 난리 났고, 얼마나 어깨가 으슥하던지... 그러고 보니 그중에 두명이 지난번 라이프로드 싱어즈에 들어가 있었네요. 우리 어르신들도, 젊으셨던 시절로 돌아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따뜻하시죠? 크리스마스는 왠지 따뜻한 추억을 만들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