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엄마 사진을 지갑에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리우면 한번씩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인터넷이 더 발달하면서 엄마의 근래 모습을 동생이 가입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사진은 엄마의 30대 모습, 그리고 동생의 사이트에서 본 엄마의 모습은 80이되신 모습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이제 47세가 되어서 30대의 젊었던 엄마를 보는데에도 여전히 엄마입니다. 그리고 이제 80이 되신 엄마의 모습도 여전히 엄마입니다. 30대의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나오고 80의 엄마의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나옵니다.
엄마의 사진이 없습니다. 미국에 올 때 이렇게 오래 있을줄 모르고 엄마의 사진을 몇장 챙기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속상한 일이 있으실때마다 당신의 사진을 없애셨습니다. 아버지에게 속상하시면 두분이 찍은 사진들이 없어지셨고, 자식이 속을 썩이면 당신의 사진이 없어지셨습니다. 그렇게 엄마의 젊은날 사진은 없어져 갔습니다. 이제 한국집에 가도 사진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난히 이뻤던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아니요.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오랜시간이 지났는데도 엄마가 입으셨던 옷들이랑 그날의 기억들이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만약에 기억하지 못한다면 슬프지 않을텐데, 과거의 모습이 기억나기에 오늘이 모습이 더 아리게 다가옵니다.
엄마의 얼굴이 슬프게 다가옵니다. 요즘 제 모습은 나살기에 바쁜 모습입니다. 난 바쁘면 “엄마 나중에 전화할게” 전화하다가도 다른 전화가 오면 끊는데, 엄마는 미리 끊으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하시는 말씀이라고는 “전화비 많이 나온다”라는 말씀입니다. 여전히 엄마는 국제전화는 비싸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사실 저희집 전화는 한달에 24불만 내면 국제전화는 무제한 공짜인 인터넷 전화입니다).
저를 낳으실 때 튼튼하게 나으시겠다고 칼슘을 많이 먹어서 머리가 크게 나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너무 고생하셔서 가끔 허리가 아프시다고 했습니다. 허리가 아프다는 것을 미국에 와서 허리를 다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무거운 것 드는 것, 옮기는 것을 별로 두려워 안하다가 정말 허리를 다친후에 허리가 아픈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엄마 내가할께”라고 좀더 말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김장하실 때 앉았다 일어났다를 그렇게 많이 하시려면 얼마나 허리가 아프셨을까 ---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열심히 했을텐데 말입니다.
엄마의 얼굴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요즘 찾기 시작합니다. 어느날 이북 사투리를 쓰시며 기도하시는 문금자 장로님의 어투에서 엄마를 발견하고 주름진 우리교회 어른들의 모습에서 엄마를 발견합니다. 어느새 그분들의 모습에 엄마가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