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기억입니다. 어릴 적 별볼 일 없던 친구가 잘 되서 갑자기 텔레비젼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무 잘된 것입니다. 놀래야 하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저것 예전에 코흘리던 찌질이 이었는데, 누구 빽 때문에 저렇게 출세했지?” 라고 말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기억속의 그 사람으로만 인식하고 보려고 합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이지요. 자식이 큰 것은 기억안하고 늘 부모님이 키워주시던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차 조심해라. 그건 먹고 이건 먹지마라” 한국가면 저는 늘 아이가 됩니다. 엄마의 기억은 어느 샌가 저를 아직도 10대의 어른으로 보고 계십니다. 사람에게 기억되어진다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기억이 그 사람의 고정이 되어 버릴 때 더 이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바꾸어 갑니다. 인격도 모습도 바뀌어 갑니다. 오랜만에 동창을 만나면 과거의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합니다. 그 시간이 너무 즐거워 다음에 또 만나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임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현재의 모습을 이야기 하지않고 과거의 이야기만 매번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오다 보면 똑같이 교복입고 출발했는데, 지금은 사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모임이 계속되려면 지금의 모습을 인정하면 가능하지만, 과거의 기억으로만 붙잡아 놓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목사에게는, 과거 교회의 흔적이 끊임없이 따라다닙니다. 목회자를 뽑을 때, 마지막으로 전화하는 곳은 그가 섬겼던 교회의 담임목회자입니다. 그러면 관계가 좋았건 좋지 않았건 목사는 신앙양심을 가지고 말을 합니다. 그것만큼은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번 실수가 끊임없이 그의 발목을 붙잡을 때가 있습니다. 같은 교회를 섬겼던 부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설교 좋고 음성 좋고 다 좋으셨습니다. 다만 한 가지 본인이 생각하는 기준을 넘으면 움직이지 않는 고집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집은 끊임없이 담임목사님과 그리고 담당 교구장, 구역장들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그리고 떠나셨습니다. 떠난지 5년여 만에 아주 큰 교회 담임목회자로 청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은퇴하시는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제가 섬겼던 목사님과 친구이였습니다. 5년동안 두 교회를 섬기셨는데, 하필 가장 안 좋게 하고 떠난 5년전의 교회로 전화가 온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된 그 목사님이 미리 전화하셔서 목사님에게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했습니다. 다행히 그분은 좋게 말씀이 되어서 그 교회 담임으로 가시게 되었답니다. 목사님께 여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바뀌었습니까?” “바뀌었지” “예전 같으면 전화 안했어. 기도하며 하나님께만 구한다고 했겠지. 아마 이번에 가면 교인들 비위도 맞추면서 잘 할꺼야. 전화한 것 보면 알지”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였습니다. 있을 때 잘하지 어떻게 자신이 불편하다고 전화하냐 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달라진 것이라 인정하게 되면 사람이 많이 깎이고 달라진 것입니다. 기억으로 보느냐 눈으로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억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고, 자신들 의자, 책상 고쳐주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고향을 오실 때 가장 열정적인 사랑으로 오신 분이 하나의 사랑도 보여주지 못하고 떠나도록 만들었습니다. 기억으로만 생각하고 현실을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014년도가 지나갑니다. 기억에 좋은 것은 생각하고 나쁜 것은 기억도 하지 않는 마무리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