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우 목사님!
군에서 제대하고 나니 낯선 청년이 있었습니다. 30여명에 육박하던 제 동기들은 몇몇 남지 않았고 3년 후배인 88기가 청년부를 잡고 있을 때였습니다. 말이 없고 수줍은 미소가 있던 청년이 바로 목사님 이었습니다. 교회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낯설어 하기도 하고, 군에서 제대한 하늘같은 선배(?) 인지라 어려워 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그 수줍은 미소가 좋았습니다. 선교단체에 들어가 기도에 미쳤을때, 편하게 같이 철야기도하자고 이야기 할 수 있는 후배였습니다. 그래서 참 많은 날 다락방 3층에서 기도모임을 같이 갖곤 하였지요. 밤새워 기도하고 새벽녘에 길거리에 앉아서 연애담(?)을 듣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두고 두고 칭찬받을 이야기가 조 목사님 고민에 지금의 조윤희 사모님 같은 분 없다고 추천한 것일 것입니다. (사모님은 제가 교사였을 때 첫번째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저도 교회사역을 나가고 후에 들으니 목사님도 사역을 나가셨다고 해서 오래 못 만났지요.
그리고 미국에 와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침 교회에 청년부 전도사 자리가 비어있어 같이 하자고 했더니 머뭇거린 이유가 저의 한국에서의 강한(?) 성격 때문이라고 하셔서 당황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지요. “목사님 성격이 변하신 것 같아요” 맞습니다. 저는 변해있었습니다. 청년들하고 골목대장 할 때하고, 교회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 목회를 하다 보니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의 잘못된 면을 고치시라고 미국에 보내셨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때만도 사실 덜 바뀐 때였습니다. 저를 한국에서 부터 안 김성봉 집사가 “목사님은 뉴욕에서 목회하셔야지 이곳은 목사님에게 안 맞아요”라고 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변하지 않는 날씨가 답답했고, 하루 종일 교회에 있어도 전화오지 않는 상황이 답답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참는 것도, 섬기는 것도 배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실수 투성이였지요. 한참 청년부가 일어날 때 목사님을 보내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답니다. 동생처럼 청년들을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청년들은 목사님의 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머리가 많이 빠졌습니다. 우스게 소리로 “나중에 머리 심어 줄께”했지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얼마 전 교회 합치기 전에는 머리가 많았는데요 라고 했지요. 그랬습니다. 교회 합치면서 목사님의 머리가 어느 때보다 많이 빠졌습니다. 울면서 저에게 교회 사임하겠다고 한 적이 몇 번 이었는지요. 힘든 이야기 들어도 내색 않던 분이, 그 자존심 강한 사람이 저 정도 이야기 할 때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을까 생각 하니 그때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입니다. 비겁하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저는 ‘형을 도와야지’ 하면서 그때는 예전처럼 목사님 이름을 부르면서 협박(?) 하였습니다. 같이 중국을 다녀오신 후에 김대평 목사님이 “조성우 목사는 담임체질이요”라고 말씀하셔서 그것을 늘 마음에 두었답니다. 언젠가는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생각도 하고 실천하려고도 했었습니다. 이제야 생각해보니 하나님의 때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성우 목사님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아마존에서 전도서를 통해서 때를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예비하신 시간에 교회를 옮기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실감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사무실 문을 두들이며 “조목사?” 외쳐도 아무런 소리가 없는 것을 느껴서야 목사님이 떠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 같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동생을 장가 보내는 심정으로 축복합니다. 형의 부족한 곳을 온몸으로 막아서며 고통한 동생 조성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처음 예수님 만나 교사가 되었을 때 사랑 준 박윤희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같이 탄생의 기쁨을 준 주은이, 소망이를 축복합니다.
주안에서 김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