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길 중창단을 보내며
미국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재정의 문제도, 영어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리움이었습니다. 미국오기 전날까지 중국에서 같이 사역하였던 젊은이들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차를 타면 어느 순간에는 환청이 들렸습니다. 너무 힘들어 하다가, 어렵게 한국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너희들이 이번에는 그냥 미국으로 와서 순회를 해라” 선교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팀들인지라 말이 안되는 일이었지만, 제 목소리의 간절함을 알았는지 감사하게도 그들이 저를 찾아 2001년도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때 교인 30여명이 안될 때였습니다. 교인수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미국을 찾아와서 열흘간 함께 있다가 갔습니다. 문제는 간 다음이었습니다. 공항에서 헤어지는데, 저도 울고, 학생들도 울고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구요. 그리고 한 열흘 정도 사람이 달라질 정도로 심하게 몸살을 앓았습니다. 어떻게 그들과 시간을 보냈는지 아는지라 아내는 그런 저를 묵묵히 기다려 주었습니다.
2002년도에 미안하지만 한번 더 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때도 학생들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미국을 찾아와 주었습니다. 그때 학생들의 손에는 자신들의 물건이 들려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살 동안 읽을 책들을 저희 부모님 집에 가서 30박스를 만들어 무게재고 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정말 잘하는 팀들이라 두 번째 왔을 때는 한인교회들이 제발 우리 교회 좀 와달라고 난리였습니다. 미안하게 오던 날부터 떠나기 전날 우리교회 주일예배까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공연을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다 떠난 것이 아니고 두 명이 남아서 저와 함께 이주를 더 있다가 갔습니다. 그래도 떠나보내면서 통곡을 하는 저 때문에 아내도, 교인들도 힘들어 했습니다. 그때 저를 정신 차리게 했던 분이 계셨습니다. 찬양팀이 가고 난지 일주일 후에 저를 부르시더니 “목사님! 목사님이 그렇게 젊은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힘들어 하면 우리 같은 늙은 사람들은 어떻하라는 말입니까?” 사실 그분이 쓰셨던 표현은 ‘양’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그 말에 정신 차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양에 대한 생각과 이젠 그들을 놓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때 그들을 마음으로 놓아주었습니다. 그들이 이젠 내양이 아니고 후임으로 온 교역자의 몫이다 라고 놓았습니다. 그리고도 그 친구들은 미국에 두 번을 더 와주었습니다. 물론 제가 가르쳤던 친구들은 새로 들어온 학생들의 교수가 되고 입시 선생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들의 모진 가르침(?)에 아이들은 마치 제가 그들의 지도목사인 것처럼 와서 대하다가 가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번에 또 그런 축복을 주셨습니다.
첫 중국사역을 같이 하였던 윤형중 목사님과 그때 노래하던 친구들을 보내 준 것입니다. 미국 첫 사역을 우리교회에서 시작하는 참 놀라운 만남의 축복입니다. 그들 중 가장 나이든 친구들은 일하는 아내와 선교단체에 있던 저를 대신해서 예석이를 데리고 자신들이 수업이 없을 때는 교대로 아이를 보아 주었습니다. 그러던 친구들이 이젠 선교사로 나가서 중국사역을 한지 길게는 8년 짧게는 6년이 되었습니다. 가장 많은 친구가 나이가 40대 초반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만나니 제 어투가 옛날 어투가 되었습니다. 옛날 이야기를 하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젠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같이 있을 때도 헤어져 있을 때도 그립지만, 그들은 더 이상 제 양이 아니고 동역자라는 사실입니다. “너 내 양이다” 말할 수 없을 신앙적인 거인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이젠 같이 나이 먹어가면서 기도해 주는 관계입니다. 그런 관계가 되려면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나이가 먹어가면서 더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