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만의 같이 가는 선교 처음 외국을 나간 것이 1990년 필리핀이었습니다. 한국CCC가 해외로 선교를 나간 그해에 저와 집사람은 마닐라에서 각기 다른 선교팀으로 섬기다가 잠시 만나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납니다. 24년전 일입니다. 그리고는 한번도 같이 선교를 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두 번째로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98년도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어느 교회의 요청으로 필리핀을 한번 더 다녀오게 됩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고백을 하였습니다. 필리핀의 그 섬이라면 선교사로 나가서 일해도 좋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입니다. 그 말은 저에게 참 감사한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희 집사람에게는 참 놀라운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저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지만 제가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에 아픔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연애를 5년할 즈음에 갑자기 신학을 할지 모른다고 하니 마음의 준비가 안된 것이지요. 집사람은 같이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꿈을 꾸었었는지 모릅니다. 결혼을 한후에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들어가려던 신학교가 한참 인기가 있어,재수, 삼수가 기본일 때였습니다. 장모님이 조용히 부르셔서 “이번에 안되면 신학 안하는 것으로 내 앞에서 다짐하게” 말씀하셔서 “네”라고 대답했는데, 어떻게 합격을 하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다닐때 ‘선교사 파송연구회’라는 서클을 참 열심히 하였습니다. 강명관 선교사와도 그곳에서 같이 활동을 했답니다. 선교사파송연구회는 당시 한국교회의 분위기처럼 선교사로 나가려는 분들과 선교사적인 삶을, 목회를 하겠다는 분들이 모였었습니다. 더구나 ‘선교사파송연구회’를 처음 만든 선배들이 한참 한국교회를 이끌어 갈 때 였습니다.(‘선교사 파송연구회’를 만든 분은 현 소망교회 담임목사인 김지철 목사님(당시 장신대교수)과 온누리교회를 담임하셨던 하용조 목사님 이셨습니다). 이 두분이 선교에 대한 개념정리도 없던 1970년대 ‘선교사 파송연구회’를 만들어서 선교를 꿈꾸었습니다. 매주 목요일이 되면 밤에 모여서 기도하고, 선교사의 삶을 조명하는 일을 하면서 같이 꿈을 꾸고 기도회를 같이 가졌습니다. 1992년부터 거의매년 선교를 다녔었기 때문에 신학생중에서는 선교경험이 가장 많다는 이유만으로 ‘선교부장’직을 맡았습니다. 가는 선교사, 안식년 오는 선교사들을 챙기고, 소개하는 일들을 맡아서 하는 궂은 일이지만 참 보람된 일이었는데, 저희 신학교에서는 일년간 단기선교를 해외에서 보내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일년동안 선교사를 도우면서 과연 자신이 선교사로 사는 것이 맞는지 훈련해 보는 대단히 좋은 프로그램이었답니다. 그리고 선교부장은 당연히 갔다오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집사람에게 우리 일년만 선교나갔다 오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둘다 사는데 너무 힘들었나 봅니다. 집사람은 아이들 키우며 병원일 하는 것이, 저는 신학교, 교회,선교단체등에서 정신없이 보내고 살았습니다. 돌아보면 후회스러운 것이 지레 집사람은 안가겠다고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물어 보지도 않았던 것이고, 다른 후회는 중국으로 그렇게 선교다닐때 집사람과 같이 못간 것입니다. 여권에 자리를 없을 정도로 해외로 나가면서 왜 아내 데리고 나갈 생각을 해보지 못했을까요? 그런데, 이번에 드디어 24년만에 같이 선교를 가게 됩니다. 마닐라 체육관에서 수천명 젊은이들 사이에서 20살의 그 여자는 어디 있나 찾아야 하는 가슴떨림은 없지만, 아무때나 부르면 옆에 있을 사람과 함께 간다고 생각하니 편안함이 있는 좋은 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