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도 강명관 선교사 만나고 쓴 글
미국에 오면서 부터 그렇게 찾아던 형이 있었습니다. 같이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고 같이 선교의 꿈을 나누었던 분이었습니다. 외국어 고등학교 교사하다가 주님을 제일 사랑하기 위하여 성경번역 선교사로 헌신하였던 강명관 선교사님이었습니다. 미국에 올때 이미 형이 브라질 아마존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듣고, 선교사 주소록을 찾아 열심히 전화를 했지만 한번도 연락이 되지 않아, 어느 때부터인가 찾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9월에 갑자기 연락이 왔는데, "난 강명관인데, 혹시 나를 기억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8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무릎연골이 찢어져 할 수 없이 한국으로 나갔다가 안식년 나머지 6개월은 공부하기 위하여 미국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12년 만에 만났는데, 형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 큰눈은 더욱 호수처럼 빛이 났고, 길어진 수염은 영낙없는 원주민같았습니다. 4년이 지나면 의무적으로 안식년을 가져야 하는데, 4년동안 성경번역한 것이 없고 보고할 것도, 안식할 것도 없다고 4년을 더 버틴 형의 모습은 거인처럼 다가왔습니다.
국어선생님이었는데, 한국말도 어눌해 지고, 이젠 영어도, 포르투칼어도, 그리고 원주민어도 다 잘못한다고 말하는데, 어린아이를 만나는 것처럼 행복했습니다. 8년 동안 형은 천국을 갈 수 있는 어린아이처럼 변하였습니다. 형수도 이젠 고등학생, 중학생이 된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글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너희들 그 큰뱀 아나콘다는 봤니?" 라고 물었더니 한참을 웃다가 "새끼를 잡아다가 애완으로 키워요" 라고 말을 하더라구요.
아마존에서도 너무 오지라 한번도 단기선교팀이 들어와 보지 못한 곳, 원숭이 잡아먹고 쥐잡아먹고, 가장 행복한 것이 원주민이 멧돼지 잡으면 마을 잔치할 때가 그렇게 행복하다는 오지! 더구나 이제 100명밖에 남지않은 부족을 위해서 언어를 만드는 그 삶이 얼마나 곤고하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는데, 눈물을 참느라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주일날 초청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감동주고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 좋으련만 그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 합니다. 그분은 웃으며 해같이 빛나며 이야기 하고 있는데, 교인들의 대부분은 눈물을 흘리며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10년 만의 만남
저는 10년 동안 누릴 것 다 누리며, 행복에 겨워서 목회를 하였고, 형은 죽으라 고생한 것 같은데, 형의 얼굴은 광채가 났고, 저는 그 밑에서 너무 죄송한 마음으로"주님 저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요" 라고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들어가면 10년동안 다시 성경을 번역하면 요즘은 컴퓨터가 발달하여 성경이 나올 것 같다고 합니다. 들어가면 그들에게 성령운동을 해서 그들이 말씀을 사모하도록 하겠다고 음치가 찬양을 배우고, 키타를 배우겠다고 열정이 대단합니다.
10년은 길지 않은 것 같습니다
10년이 지나고 다시 만나면 형에게 뒤지지 않는 얼굴을 하고 만나고 싶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주님이 내안에 계시므로 늘 평안을 유지하며 주님의 종다운 얼굴을 하고 형을 만나고 싶습니다. 내 자식들이 열심히 잘 자라서 형의 아이들처럼 대를 이어서 성경을 번역하겠노라는 말을, 아버지를 이어서 목회에 헌신하겠다고 우리 자식들도 스스럼 없이 말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신자되기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이 원하는 신자가 될까 늘 고민하며 이 찬양을 한다는 형처럼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종이될까 늘 고민하며 10년을 보내고 싶습니다. 10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차이가 나게 세월을 보냈습니다.(2007년도 다시만나고 난후 기독교 잡지에 올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