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이라고 하면 밥을 먹다가도 뛰쳐나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처음 부임하였을 때가 그랬던 때였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사람이 목사였고, 평균 연령이 60정도 되었던 때였습니다. 지휘하는 김성봉 집사님이 2002년도에 등록을 하고 그때부터 젊은이들 유치를 위해서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마침 예전 교회 옆이 대학교였기 때문에 대학교에 교회 홍보물을 갖다놓고, 교회를 개방하고 부엌에는 마음껏 라면을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비치했습니다.
뉴욕으로 간 김우성 집사가 먼저 교회에 등록을 하고 교회마당에는 농구하러 오고, 라면 끓여먹으러 오는 20대의 젊은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주일날 나오지 않아도 평일에는 그래도 목사를 만나고 같이 즐기는 젊은이들이 10명 정도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김우성 집사의 오랜 친구인 김경환 집사도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첫 청년부 수련회를 2003년도에 요세미티에서 가질 수 있었습니다. 청년들이 14명이 가는 그래도 꽤나 큰 수련회였습니다. 그때부터 교회는 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절반 정도는 예수를 안 믿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친구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무조건 튀어나가던 시절입니다. 젊은이들이 단 한 달을 머물러도 두 달을 머물러도 교회는 그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김경환 집사는 예의가 바르고 똑똑한 친구였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주장도 분명해서 ‘나는 예수 안 믿는다’라고 똑부러지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입에서 술 냄새가 나도, 담배 냄새가 나도 괜찮았습니다.
김성봉 집사가 결혼해서 얻은 김이준 집사님이 청년부 간사로 섬기면서 틀이 만들어지기 시작 했습니다. 그때 김 집사의 집은 사랑방 같았습니다. 집으로 초대해서 밥을 먹이는 일을 했습니다. 사람을 섬기는 일은 늘 아픔이 같이 옵니다. 청년들 사이에 반목과 아픔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년들의 숫자가 30명이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 시기, 유학와 2005년부터 같이 한 조성우 목사의 수고가 엄청났습니다. 워낙 심성이 고왔던 조성우 목사의 따뜻함이 그들을 따뜻하게 품었습니다.
같은 아파트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새벽에 같은 차를 타고 교회를 오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벽부터 밤까지 교회에는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모였었습니다. 술 먹고 너무 힘들다고 찾아오는 청년들, 의리를 지키겠다고 새벽에 술 냄새 품기며 와서 묵도할 때부터 자기 시작해서 아침 늦게까지 예배당에서 자는 동헌이까지....
어르신들은 젊은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자신들이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를 믿기 시작했고,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김경환 집사 결혼식 기도를 준비하는데, 그때 일들이 하나 둘 떠오릅니다. 속도 무지하게 썩였는데, 그래도 가슴으로 품었던 청년이라 그런지, 더 잘해주지 못한 속아림이 일어납니다.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