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종숙 권사님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가신 권종숙 권사님은 1920년에 태어나셨습니다. 처음 뵐 때 “권사님 저희 아버지도 권사님과 같은 해에 태어나셨어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제 모습과 아버지의 연세가 잘 연결이 안 되시는지 “목사님이 그렇게 나이가 많아요? 라고 물으셨습니다. 제 아버지의 연세를 생각하면 제 나이는 대략 60이 훌쩍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권사님은 말씀을 거의 안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어른들을 모신 차안에서도 거의 입을 다물고 계셨습니다. 이럴 때는 권사님이 한 말씀 해주셔도 좋겠다 싶어도 권사님은 다른 분들이 의견을 내시면 가만히 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못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한번 말씀을 하시면 참 이쁘게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권사님의 손은 참 따뜻했습니다. 다른 분들에게 권사님 어떠셨어요? 하고 여쭈어 보면 권사님은 손을 잡아 주실 때 참 느낌이 달랐어요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느낌이 무엇인지 대부분 그분의 손을 잡을 때 느꼈을 것입니다. 손을 잡고 쳐다보시는 그 미소가 차가운 손마저도 따뜻하다고 느끼게 한 것입니다. 손을 잡으시면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어 주셨습니다.
권사님이 교회 바로 입구에서 따님의 차를 기다리시다가 넘어지신 적이 있었습니다. 머리에 피가 나고 얼굴에 상처가 나는 큰 상처였습니다. 예배 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괜찮다고만 하셨습니다. 사실 앞으로 넘어지시면서 95세의 어른이 무슨 방어를 했겠습니까? 얼마 후에 얼굴에는 딱지가 있으신데 “놀라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권사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조선팔도 가장 북단인 함경북도 그것도 함흥 태생답게 씩씩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주는 것, 신경 쓰게 하는 것을 참 힘들어 하셨습니다.
권사님이 만들어 주시는 가자미 식해는 별미 중에 별미였습니다. 가자미 식해는 사실 중국의 취두부(두부를 소금에 절여 만든 것, 보통 썩은 두부 요리로 생각하는 것, 일반 사람들은 잘 먹지 못함)처럼 남한에서 태어나신 분들은 삭힌 냄새에 잘 먹어보지 못하는 음식입니다. 잘못 발음을 해서 식혜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식혜가 아닙니다. 가자미를 삭혀서 만든 음식입니다.
어느 날 심방을 갔는데 권사님이 한술 뜨고 가라고 하시면서 내논 음식에 안 먹어보았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 귀한 가자미 식해가 올라온 것입니다. 목사는 교인과 식사를 하면 음식을 가리면 안됩니다. 그런데, 가자미 식해는 부모님이 이북 태생이신 저에게는 별미 중에 별미입니다. 그래서 참 맛있게 가자미 식해를 먹었습니다. 신기하셨던 것 같습니다. 가자미 식해를 젊은 사람이 먹는 것이 말입니다. 그리고 한주 후에 93세된 권사님은 목사에게 가자미 식해를 만들어 보내 주셨습니다. 그것도 김치 담그는 꽤 큰 통에 하나 가득 말입니다.
과테말라 다녀온 후에 바로 찾아뵌 분이 권사님 이셨습니다. 이가 없으셔서 무슨 말씀을 해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권사님 구역 담당이신 이성엽 장로님이 글로 권사님 드시고 싶은 것 만들어 드리겠다고 하시면서 종이에 열심히 여러 가지를 적었습니다. 권사님이 하나를 짚으셨는데 그것은 바로 ‘팥죽’이었습니다. 장로님이 “다음에 꼭 해올께요” 라고 말씀드리고 다시 심방이 잡혀있던 전날에 돌아가셨습니다. 권사님 돌아가신 다음날 이성엽 장로님께 신경질을 냈습니다. “음식해서 간다고 했으면 빨리 갔어야지요” 그러나 그 약속을 한 것은 불과 일주일 전의 이야기였습니다. 장로님도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만남에 잘 못알아 듣는 제 귀를 세 번이나 당기셔서 귓속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두 번을 들어도 잘 못알아 들었는데 세 번째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 말씀은 “보고 싶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이제는 저도 ‘권사님이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릴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분들을 자꾸 보냅니다........ 보고 싶은 분들을 보냅니다. 보고 싶은 분들이 가는 곳이기에 살아서도 가고 싶은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