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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이용희 교수 62024-02-02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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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주님과의 교제 생활화한 미국 친구 믿음에 감명

유학 중 한인교회 ‘회개의 밤’ 통해 주님 뜻보다 나만 앞세운 기도 반성

입력 2015-09-08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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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가 1989년 미국 시애틀 워싱턴대 대학원 교정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88년 9월 미국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 대학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81년 2월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지 7년 만에 다시 경제학 공부를 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미국 문화도 낯설었다. 그래서 유학 첫해는 스트레스가 심했다.  

시애틀 중앙침례교회에 출석했다. 신혼부부와 청년을 맡아 성경공부를 가르쳤다. 한번은 지역 한인교회에서 주관한 ‘회개의 밤’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문학의 밤’ ‘찬양의 밤’은 들어봤지만 ‘회개의 밤’은 처음이었다. 당시 유학생활이 내 뜻대로 안돼 참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날 밤 특별한 은혜와 깨달음이 있었다.

기도 중 주님께선 이런 영감을 주셨다. 길을 가는데 옆을 보니 예수님이 안 계셨다. 뒤돌아보니 예수님께서 멀찌감치 따라오고 계셨다. 주님은 난처한 얼굴이었다. “예수님, 빨리 오셔야죠! 그렇게 뒤처지면 어떡해요?” 그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용희야! 네가 나한테 헌신한 것이냐, 아니면 내가 너한테 헌신했느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돌이켜보니 주님께 기도로 여쭙지 않고 ‘주님, 제가 이렇게 결정했으니 꼭 이루어 주십시오’라며 강청하고 있었다. 예수님을 하인 부리듯 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주변 환경은 힘들게 꼬여 있었고 마음에 평안이 없었다. 그날 밤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회개기도를 드렸다. “주님, 종놈에 불과한 제가 주인님을 몸종처럼 부렸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워싱턴대 대학원에서 2년간 공부하고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90년 미국 동부에 위치한 예일대 대학원으로 옮겨 국제개발경제학을 전공했다. 학교 안에 있는 인터내셔널교회에 출석했다.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예배에 참석했다. 

인터내셔널교회에 출석하면서 미국 크리스천의 신앙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학업을 쫓아가기 어려웠다. 여러 면에서 도움을 준 미국인 크리스천 친구들이 있었기에 학업을 어렵지 않게 마칠 수 있었다.

특히 조엘 펫처라는 친구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펫처는 내가 기숙사 생활을 하며 힘들게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을 때 큰 힘이 됐던 좋은 친구다. 한인교회를 갈 때도 그는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함께 참석해 내 옆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 

펫처는 어려울 때마다 중보기도를 해주었다.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보살펴줬다. 보잘것없는 한국의 유학생을 희생적으로 섬기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천사 같은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번은 이렇게 물었다. 

“조엘 펫처, 너의 섬김을 보면 빛이 난다. 네가 가진 믿음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응, 나는 네 살 때 아버지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어. 그 이후로 계속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고 있지. 그리고 부모님은 집에 TV를 아예 두지 않았어.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TV를 보지 않고 자랐지.”

나는 대학생 때부터 농촌전도를 다니며 중학생 이상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초청했다. 초등학생이나 미취학 어린이들은 아직 어려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펫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렇다. 예수님은 빨리 영접할수록 좋은 것이다. 펫처처럼 예수님을 빨리 영접해야 신앙심 좋은 청년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때의 깨달음 이후로 농촌전도를 나가면 꼭 유치원생부터 초등부 어린이까지 모아놓고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도록 했다. 실제로 수많은 어린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18) 귀국했다가 결혼 강권하는 아버지와 팽팽히 맞서

결국 공부 늦추고 기도모임 이끌던 중 UNDP 프로젝트 맡아 직장생활 시작

입력 2015-09-0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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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왼쪽)가 1994년 유엔개발계획 내셔널 컨설턴트로 인도를 방문해 현지 경제 관료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미국 예일대 대학원에서 국제개발경제학 석사학위를 마치고 앤아버에 있는 미시간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과정 입학허가를 받았다.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인 1992년 여름 한국을 방문했다. 아버지는 누나와 형들이 모두 결혼했기 때문에 막내인 나를 꼭 결혼시키겠다고 작정하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한국에 나온 나는 농촌 전도 활동 등으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아버지는 급한 마음에 여러 곳에 중매를 부탁하셨다. 그렇게 수차례 선을 봤는데 어느 순간 선을 보는 게 좀처럼 내키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버지와 팽팽히 맞서기 시작했다. “결혼을 안 하면 미국에 절대 못 들어간다.” “아버지, 저는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공부를 1년 늦추고 결혼한 뒤 미국에 다시 들어갈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한국에 나왔을 때부터 작은 기도모임을 시작했다. 은사이자 신앙적으로도 돌봐주셨던 박을용 박사님이 진지하게 부탁하셨다. “용희야, 교회를 비판하고 돌을 던지는 사람이 많구나. 그런데 그 돌을 맞으며 교회를 위해 울며 회개 기도하는 사람이 없어. 네가 한국교회를 위해서 회개 기도하며 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을 좀 시작해야겠다.” 

온누리교회 장로이신 박 박사님은 한동대 부총장까지 역임하신 분이다. 세계은행에서 근무하다가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교류협력센터 소장으로 오셨다. 

‘나도 부족한데 어떻게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 그래도 박 박사님의 말씀을 거절할 순 없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까운 친구들과 기도모임을 시작했다. 사역자와 중보기도자들이 주로 모였다. 다들 바쁘게 사역하고 있어서 매주 월요일 저녁시간을 잡았다. 모임 이름도 ‘월요 기도모임’이라고 했다. 한국사회와 교회, 북한선교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했다. 

기도모임은 온누리교회, 사랑의교회,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채플 등에서 열렸다. 분야별로 전문성을 갖고 기도하기 위해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특강을 청취한 뒤 기도제목을 정리해서 기도했다.

1993년 여름 박 박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용희야, 유엔개발계획(UNDP) 경제개발 프로젝트에서 일 좀 해야겠다.” “예? 저는 미국 박사과정 입학허가까지 받아 놓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 번 기도해 봐.” 
‘그래, 박사과정은 좀 늦어도 되니 UNDP 일을 하면서 결혼문제부터 해결하자.’ 한국에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직장생활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해 9월부터 UNDP에서 진행하는 아시아태평양지역 경제개발 프로젝트에서 내셔널 컨설턴트를 맡았다. 주 업무는 중국 베트남 몽골 등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 담당 공무원들에게 시장경제를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의 경제개발도 도왔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경제개발분과 네트워크 코디네이터로 경제개발 프로그램과 국제행사 등을 진행했다.

과거 공산주의 국가에 들어가서 현지 공무원들과 교제하며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저개발 국가를 도우면서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한국전쟁 이후 선진국으로부터 구호물자를 받던 우리나라가 어려운 나라를 돕는 국가가 됐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러나 월요 기도모임과 UNDP 업무에 주력하면서 결혼은 계속 미뤄졌다.  

(19) “뇌경색 아버지 섬길 천사같은 아내 보내주세요”

간절한 10년 기도에도 응답없어 서운… “아버지 천국서 치유” 말씀 듣고 감사

입력 2015-09-10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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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왼쪽)가 2000년 강원도 속초에서 뇌경색으로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어머니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1994년 8월 1일 서울 홍릉 한국개발연구원 사무실에서 유엔개발계획 업무를 보고 있는데 노태진 영동제일교회 목사님의 긴박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예? 뭐라고요?” 당시 아버지는 농촌 미자립교회 침술선교팀 총무를 맡고 계셨다. 7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농촌전도 물품을 구입하려고 무더위에 청계천에 나갔다가 쓰러지신 것이다. 

병원으로 뛰어갔다. 아버지는 의식이 없었다. MRI 촬영 결과 뇌경색이었다. 그날 밤 병원에서 아버지를 붙잡고 눈물로 간절히 기도드렸다. 기도모임 친구들도 소식을 듣고 병원에 달려와 밤새도록 함께 기도했다.

감사하게도 아버지는 이튿날 의식을 되찾았다. 그러나 언어장애와 반신마비가 왔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말씀을 못하고 반신불수가 됐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는 아버지를 간병했다. 중풍환자들이 기저귀를 차면 욕창이 생긴다는 얘기가 있어서 기저귀를 사용하지 않았다. “어머니, 저랑 조금 힘이 들더라도 아버지 옆에 있다가 대소변을 그때그때 받아내도록 해요.”

작은 인기척을 듣지 못해 소변을 제때 못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몸을 다시 씻겨드렸다. 아버지는 고령이라 그런지 밤에 주무시다가 소변을 자주 봤다. 여러 번 잠을 깨서 소변을 받았지만 별로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런 말이 생각났다. ‘사랑하면 힘들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병환이 지속되면서 어머니도 많이 늙으셨다. 종종 아버지를 모시고 올림픽공원이나 인천 부둣가로 산책을 나갔다. 한 번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친구 목사님과 함께 동해안으로 여행을 가서 회도 먹고 부둣가를 따라 걸었다. 아버지께서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증세는 점점 나빠졌다. 치매 증상을 보일 때도 있었다. 또 말로 의사표현을 못했기 때문에 눈치로 아버지의 생각과 상황을 잘 헤아려 간병해야 했다. 그래서 이런 기도를 계속 드렸다. “주님, 저한테 아내를 주시려면 천사 같은 자매를 보내주셔서 아버지를 사랑하며 잘 간병하게 해주세요.” 마음 한구석에는 해외 업무와 단기선교 등으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할까봐 무척 걱정됐다. “주님, 제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며 병시중을 들 수 있게 해주세요.”  

2005년 1월 초, 아버지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이 그치지 않아 국립의료원에 입원했는데 폐렴으로 확대됐다. 1월 31일 아침이었다. “부친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가족을 부르시지요.” 급하게 산소마스크를 쓴 아버지는 점점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마지막 임종시간에 아버지를 위해 간곡히 기도드렸다. 기도를 마치는 순간 아버지는 환한 얼굴로 숨을 거두셨다. 

장례를 치르고도 마음 한구석에는 하나님께 대한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 10년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의 치유와 천사 같은 아내를 주셔서 아버지를 잘 섬기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를 회상하며 조용히 기도드릴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용희야, 지금 아버지는 천국에서 완전히 치유되셨단다. 너는 천사 같은 아내가 아버지를 간병하길 원했지만 지금 천국에선 천사들이 너의 아버지를 수종하고 있단다.” 

‘그래, 주님께서 나의 기도에 모두 응답하셨구나.’ 그때부터 감사기도가 터져 나왔다. “주님, 부족한 제가 아버지를 위해 드렸던 모든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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