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용희 (10) “기도로 병사들 섬기는 군종병이 되고 싶어요”백골부대 훈련 뒤 인사장교 물음에 편한 사단 행정병 마다하고 자청입력 2015-08-28 00:54
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왼쪽)가 1981년 7월 강원도 철원 백골부대에서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사수인 하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81년 2월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5월 12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78년 여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3년간 선교단체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았던 터라 휴양소에 간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막내였다. 하지만 두 형 중 큰형은 레지던트 수련과정 중이었고 작은형은 의대 재학 중이어서 내가 제일 먼저 군대에 가게 됐다. 그래서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다.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후 곧바로 경기도 의정부 101보충대로 옮겨졌다. 부대 배치를 앞두고 다들 긴장상태였다. “너희들은 운이 좋아서 수도권으로 배치될 것이다. 단 백골부대만 가지 않으면 된다.” 조교의 말에 동기들 모두가 좋아했다. 부대 배치를 받던 날 대부분 동기들은 군용트럭을 탔다. 나를 포함한 30여명은 전세 관광버스를 타게 됐다.
‘웬 횡재냐. 군대에서 관광버스까지 타고.’ 기쁨은 잠시였다. “멀리 전방으로 가는 병사는 트럭이 아닌 관광버스에 탄다.” 인솔병이 말했다. ‘아뿔싸!’ 버스가 38선 휴게소를 지나 휴전선 최전방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해골 모양이 그려진 백골부대 표지가 눈에 확 들어왔다.
‘조교가 백골부대만 안 가면 된다고 했는데….’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동기들은 모두 버스 안에서 신세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동기는 “돈 있는 놈은 돈으로 빼고, 백 있는 놈은 백으로 빼고, 돈과 백 없는 우리만 백골부대에 끌려왔다”며 투덜거렸다. 누구는 조상 탓을 했다.
백골부대 신병교육대에 도착했을 땐 부슬비가 내렸다. 조교들이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관광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강도 높은 얼차려가 시작됐다. 막사까지 오리걸음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막사 안에서도 계속되는 얼차려에 동기 몇 명은 쓰러졌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다행히 얼차려가 끝났다. 이어 정신교육이 있었고 얼마 후 취침에 들어갔다.
잠들기 전 군종병이 내무반에 들어왔다. “주님, 이곳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십시오.” 그는 우리를 위해 정성껏 취침기도를 해줬다. 동기들은 백골부대에 도착하면서부터 온갖 쌍욕만 듣다가 존댓말로 하는 기도를 듣고 다같이 울먹였다.
첫날부터 북한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대남방송 때문에 잠을 청할 수 없었다. 휴전선에 왔다는 게 실감났다. ‘남들은 논산에서 편하게 4주 훈련을 받는다던데….’ 강원도 철원 백골부대에서 유격을 포함한 6주간의 강도 높은 신병훈련이 진행됐다.
힘든 훈련을 다 마치고 자대 배치를 앞두고 있는데 사단본부 인사장교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인사장교가 신상카드와 나를 번갈아 봤다. 동기들보다 나이도 많고 몸도 약해 보이니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인사장교가 입을 열었다. “이용희! 너 어디로 가고 싶냐?”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사단본부 행정병이 제일 편한 보직이었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뚱딴지같은 말이 튀어 나왔다. “군종병을 하고 싶습니다.” 인사장교가 신상카드를 뽑았다가 멋쩍은 듯이 다시 내려놓았다. 군종병은 인사장교가 아닌 군종장교가 선발한다. 나는 막사 뒤로 돌아가 땅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아니, 내가 왜 사단본부 행정병이 아닌 군종병을 한다고 했을까. 굴러 들어온 복을 발로 차다니. 군대에서는 좀 쉬다가 제대하려고 했는데….’ 한숨을 쉬며 후회를 하다가 갑자기 취침기도를 해준 군종병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주님께 기도를 시작했다. “주님, 취침기도를 해줬던 그 군종병처럼 저도 많은 병사들을 기도로 섬기는 군종병이 되고 싶습니다.”
(11) DMZ 수색대 차출 직전에 군종병 부르심 받아“군종병은 영적인 지휘관” 책임감… 사고 터질 때마다 기도 부족 회개입력 2015-08-31 00:15
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오른쪽)가 1981년 백골부대 3대대 군종시절 전임 군종병(가운데), 중대 군종병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81년 6월말 강원도 철원 백골부대에서 신병교육을 마치고 휴전선 철책에서 근무하는 22연대로 배정됐다. 연대본부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신병들이 모두 수색대로 차출된다고 했다. 신병 모두가 열 손가락의 지문을 찍었다. 당시 철책부대 수색대는 비무장지대(DMZ)에서 활동하는 특공대 성격을 띠고 있었다. ‘휴전선 철책까지 왔는데, 이제는 DMZ에서 복무한다고 하니 갈 데까지 가는 구나.’
취침시간이 돼서 연대 대기병 막사에 누워 있는데 밤늦게 누군가 다가왔다. “이대 다락방전도협회에서 활동하면서 농촌봉사활동을 했다고?” 군종병이었다. 그는 내가 선교단체에서 활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일 군목님께 보고 하겠다”고 했다. 주일 밤 군목님이 막사로 찾아왔다.
“이용희, 선교단체에선 어떤 일을 했는가?” 군목님은 몇 가지 사항을 묻더니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사실은 3대대 군종병을 찾고 있는데 말이다. 수색대만 아니면 참 좋은데 안됐다.” 군목님은 그 말을 끝내고 발길을 돌렸다. 당시 수색대로 차출돼 열 손가락 지문을 찍으면 보직 변경은 어려웠다.
다음날 아침 부대배치가 발표됐다. “김모, 수색대!” “이모, 수색대!” “박모, 수색대!” 내 차례였다. “이용희, 3대대 본부!”
‘아, 하나님께서 나를 3대대 군종으로 파송해 주셨구나.’ 후일담을 들어 보니 군목님은 발령 직전에 크리스천이었던 연대장님을 찾아가 나를 수색대에서 3대대 군종병으로 변경했다는 것이다. 이등병 시절부터 철책부대 군종병으로 생활했다.
부대에선 지뢰폭발 등 각종 사고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사병 1인당 하루에 100원씩 생명수당을 줬다. 당시 이등병 월급이 한 달에 3000원이었는데 생명수당도 똑같이 3000원이었다.
그해 8월 군단 수양소에서 열린 첫 군종수련회에 참석했다. 군종참모 목사님께서 대대 군종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여러분은 사병이지만 영적으로는 부대 지휘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고가 나면 부대장 책임이 아니라 여러분 책임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렸다.
9월쯤 우리 부대에서 하사관 한 명이 수류탄으로 자폭해 죽은 사고가 발생했다. 애인이 변심했는데 철책근무 중이라 휴가를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너무 힘들어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는 바로 대대장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대대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잘못을 구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기도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제 책임입니다.” 기도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내 기도가 부족해서 사고가 났다고 생각했다. 대대장님께 용서를 구했다.
후에 또다시 사건이 터졌다. 한 사병이 탈영한 것이다. 다시 대대장님을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그때 대대장님은 기독교인이셨다. 사고가 나면 내가 기도를 소홀히 해서 생긴 사고라고 여겼다. 대대장님의 종교나 지휘 능력과 상관없이 부대의 안전이 영적 제사장인 군종병의 기도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방 부대에서는 신병이 자대배치를 받으면 대대 군종병이 상담했다. 문제 사병으로 생각되면 보고를 해서 전방에서 후방으로 옮겼다. 가끔씩 군대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사병들이 휴전선 철책을 넘어 월북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등 직속 지휘관들이 처벌 받았다.
82년 어느 날 막 도착한 신병과 상담했다. 어떻게 위로를 할까 고민하는데 신병의 첫 마디가 의외였다. “백골부대 온 것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2) “백골부대 배치 하나님께 감사” 신병에 깜짝불신자 어머니 하나님께 인도 위해 어려운 선택한 병사에 ‘은혜’받아입력 2015-09-01 00:31
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오른쪽)가 1983년 4월 강원도 철원 군대교회에서 촛불예배를 드리고 있다. 당시 부대 내 교회는 40명밖에 수용할 수 없는 데다 난방이 되지 않아 예배를 드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대부분의 신병들은 백골부대에 올 때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한숨을 쉬었다. “돈 없고, 빽이 없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는 군종병으로서 신병들을 위로하며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바빴다. “신병, 젊은 날 고생은 사서도 한다. 힘든 군대 생활은 오히려 우리에게 약이 된다. 고난을 통해 인생의 너비와 깊이가 더해지는 거야. 후방에 편하게 있으면 게을러지고 나태해질 수 있어. 자, 지금의 어려움을 한 번 이겨내 보자!”
이런 분위기에서 갓 배치 받은 한 신병이 “백골부대 온 것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한 것이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신병 얼굴에 확신이 가득해 보였다. 신병은 외동아들이었고 집안에서 혼자 예수를 믿는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점집 단골손님이었다.
그가 입대 영장을 받았을 때 그의 어머니는 점집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아들아, 오늘 너의 군대 점을 봤다. 아주 힘든 부대에 배치된다고 나왔더라. 그래서 복채를 많이 주고 너의 군대 점을 바꿨다. 너는 이제 제일 편한 곳에서 군대생활을 할 거야.” 어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저는 지금부터 제일 힘든 부대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할 겁니다. 제가 제일 힘든 부대에 배치되면 그때부터 어머니가 믿는 미신이 거짓이며 제가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 줄 아세요. 그리고 그날부터 교회에 다니세요.”
실제로 그는 입대 후 가장 힘든 부대로 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경기도 의정부 101보충대에서 ‘백골부대가 가장 힘든 부대’라는 얘기를 듣고 그때부터 백골부대에 가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백골부대에 배치됐을 때 너무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어머니가 앞으로는 점쟁이를 찾아다니지 않고 교회에 다니실 겁니다.” 군종병인 내가 오히려 큰 은혜를 받았다.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신병의 군대생활과 어머니의 구원과 신앙생활을 위해 간구했다.
1년 간 휴전선 철책근무를 마치고 부대가 철책선에서 남쪽으로 이전했다. 주로 군사훈련 위주였다. 3대대 병력은 500명이 넘었는데 군인교회는 40명 이상 수용할 수 없었다. 예배당이 좁다 보니 주일 예배를 부대 식당에서 드렸다. 식탁과 의자는 돌로 만든 것이었다.
주일 오전 예배는 200명 이상 함께 드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교회에 있던 강대상, 풍금, 성경·찬송, 헌금바구니 등을 모두 옮겼다. 문제는 겨울이었다. 강원도 철원의 겨울은 영하 20도 아래로 내려갈 때가 많았다. 그런데 에너지를 절약한다며 겨울에는 식당에 난방을 하지 않았다. 워낙 춥다 보니 소대별로 음식을 타서 내무반에서 각자 식사할 정도였다. 한겨울 부대 식당에서 드리는 주일 예배는 냉동실 안에서 드리는 예배 같았다. 차디찬 돌 의자에 앉으면 엉덩이를 통해 올라오는 냉기가 등골을 타고 온몸에 퍼졌다. 예배를 드리며 발이 시려 동동 구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당시 군대에선 ‘전군 신자화 운동’과 ‘1인 1종교 갖기 운동’이 시행되고 있었다. 병사들은 주일 오전 기독교 불교 가톨릭 중에서 하나의 종교행사에 참여했다. 믿음이 좋은 병사들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배를 드렸지만 믿음이 없는 병사들은 따뜻한 내무반에서 열리는 미사나 법회에 참석했다.
이런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렇게 첫 겨울을 지내고 나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예수 믿는 병사들이 다함께 예배 드릴 수 있는 넓은 예배당을 주세요. 초신자들이 추운 날에도 가톨릭이나 불교로 가지 않고 교회에 올 수 있도록 넓은 예배당을 주세요.” (13) “軍예배당 건축” 40일 작정기도 뒤 헌금 술술대대장에 건축 허락 받고 모금 활동… 소망교회·영락교회에서 후원 약정입력 2015-09-02 00:15
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왼쪽 두 번째)가 1983년 4월 김태구 백골부대 제3대대장(오른쪽 두 번째) 생일파티에 참석했다. 하연수 사모(가운데)는 32년이 지난 지금도 이 대표의 사역을 돕고 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1983년 봄이 왔다. 그해 7월로 예정된 제대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군대 예배당만큼은 반드시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종계통으로 교회 재건축 계획을 보고했다. 민간교회와 성도들의 헌금으로 군대교회를 짓는다는 계획이었다.
“불가.” 결과는 간단했다.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군대 내에서 민간지원으로 특정종교를 확장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낙심이 되었고 절망스러웠다. 군종실에 누워서 스스로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래, 제대 말년에 교회 짓느라 고생하지 말고 그동안 못했던 공부나 하다 가자.’ 그때 내 마음에는 실오라기 같은 가능성 하나가 스쳐갔다.
당시 김태구 대대장님과 하연수 사모님은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사모님께서는 주일 저녁예배는 물론이고 수요예배까지 나와서 풍금 반주를 해주셨고 교회를 정성껏 섬겼다. ‘그래, 마지막으로 대대장님께 말씀드려보자. 대대장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아니면 그만두자.’
용기를 내서 대대장님을 찾아갔다. “백골! 병장 이용희! 대대장님께서도 느끼셨겠지만 군대교회 예배당을 꼭 건축해야 할 상황입니다. 제가 말년 휴가 때 나가서 모금을 해오겠습니다. 예배당 건축을 허락해 주십시오. 지휘계통만 문제없게 책임져 주시면 모든 건축은 제가 맡겠습니다.”
대대장님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래? 그건 내가 책임지지. 자네가 힘껏 해보게.” 그렇게 단번에 교회건축 허락을 받았다. 군종계통으로 허락이 나지 않았던 일이 대대장님께서 책임지시겠다면서 한번에 풀렸다. 하나님의 역사였다. 추운 겨울 냉동실 같은 예배당에서 주일예배를 드릴 때마다 안타깝고 원통한 마음으로 군종들이 모여 간절히 부르짖었던 기도의 응답이었다.
교회건축 허락을 받은 기쁨도 잠시, 평생 한번도 해본적 없는 모금운동과 교회건축 총감독을 맡아야 했다. 수천만원의 건축비는 사병 입장에서 꿈꿀 수도 없는 큰돈이었다. 먼저 건축 견적을 내기 위해 기독교인 공병대 소령님을 찾아갔다. 우리 사정을 말씀드리고 교회건축 설계를 부탁했다. 그리고 중대군종과 소대군종 등 총 21명을 소집해 교회건축을 위해서 주일 하루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이 사실이 당직 장교에게 알려졌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대대군종, 너 이 자식 미쳤어? 정신 차려! 최전방 군인들을 금식시킨다는 게 말이 되냐? 사병들에게 밥을 먹여야 힘을 내서 나라를 지킬 것 아냐!” 욕설이 쏟아졌다.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금식기도 없이 이렇게 중요한 일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모금을 위한 말년 휴가를 앞두고 날마다 저녁시간에 군인교회 예배당에서 방석을 깔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매일 1시간 이상씩 40일 작정기도를 드렸다. 그해 6월 2주간의 말년 휴가는 빠르게 지나갔다. 여러 교회를 찾아가 전방부대의 상황을 말씀드렸다. 교회건축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감사하게도 가까운 친지와 몇몇 교회에서 구체적인 도움을 주셨다.
서울 소망교회를 찾아갔다. 곽선희 목사님을 뵙고 대대교회 건축 설계도를 보여드렸다. “기특하네. 이 병장.” 곽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금일봉을 건축헌금으로 주셨다. 그 다음으로 군선교가 활발한 영락교회를 찾아갔다. 여선교회 회장님을 만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최근 군선교의 문이 닫히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대장님께서 책임지고 교회건축을 허락하셨다니 정말 놀랍군요.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재정을 우리가 맡겠습니다!” 여선교회 회장님은 그 자리에서 흔쾌히 승낙을 하셨다. ‘한국교회에 이렇게 멋진 신앙의 여장부가 있다니.’ 감격스러웠다. 감사와 찬송이 저절로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