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용희 (7) 농촌전도 마치고 난 뒤 심각한 ‘삶의 고민’ 시작“여러분을 가장 잘 아는 분은 하나님”… 수련회 목사님 말씀 듣고 눈물로 회개입력 2015-08-25 00:07
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 등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농촌 전도팀이 1978년 8월 강원도 영월군 삼옥리로 들어가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있다. 1978년 7월 초 전도수련회를 마친 후 20여개 전도팀이 농어촌으로 흩어졌다. 나는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총무인 서용원 목사님을 모시고 충남 온양으로 향했다. 새벽에는 새벽기도회, 오전에는 어린이성경학교, 점심에는 축호전도를 실시했다. 오후에는 중·고등부 성경학교, 저녁에는 마을전도집회를 열었다. 밤에는 청년집회를 개최했다.
이때 처음 농촌전도를 하면서 중요한 것 하나를 깨달았다. “용희야, 연극 준비가 부족하니 설교시간에 나가서 연극 준비 좀 하고 와라.” 선배의 조언대로 설교 중에 연극 준비를 했다. 공연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주민들과 아이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와 달리 전도팀장인 선배는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다. 부팀장을 맡았던 누나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날 밤 선배가 설명해줬다.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고 연극을 준비해? 도대체 너희들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알고 보니 서 목사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던 거다. 비로소 깨달았다. ‘연극을 못 하더라도 설교시간은 절대 빠지면 안 되는구나.’
훗날 전도팀장을 맡게 된 나는 분명한 원칙을 밝혔다. “연극을 망쳐도 좋으니 설교시간에는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세요.” 교회 청년들을 데리고 단기선교를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교대원들이 인형극 등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예배 시간에 빠지겠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나와 전도팀 모두의 영혼을 지키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공연만 잘하고 전도팀들이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영혼은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온양지역 전도를 마치고 곧바로 2차 농촌전도에 투입됐다. 큰형이 선교를 하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강원도 영월군 삼옥리였다. 큰형이 떠난 지 5년 만에 그 땅을 밟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곳엔 큰형을 기념하는 삼옥감리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전도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농촌전도에 몰입했던 한 달간은 정말 주님의 은혜로 정신없이 살았구나.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살지? 예전처럼 술도 마시고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산돌을 그만둬야 하나, 아니면 전도를 갔다 온 사람답게 술을 끊고 계속 전도에 힘써야 하나.’
서울에 돌아와서도 갈등은 계속됐다. 그러던 중 8월 말 ‘농촌 초신자 수련회’가 열렸다.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에선 농촌전도 후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초신자들과 농촌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신앙수련회를 가졌다. 농촌교회 일꾼을 세우기 위한 신앙훈련 코스였다.
마지막 날 부흥회 강사로 오신 이동원 지구촌교회 목사님이 메시지를 전했다. “누가 여러분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가 여러분을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가 여러분의 인생을 최선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 앞에 내 대답은 모두 ‘나’였다.
그런데 강사님의 말씀은 달랐다. “여러분을 가장 잘 아는 분은 여러분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앞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원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부인할 수 없는 진실 앞에 직면한 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인생은 원래 나의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주님의 것이었어.’ 내 인생이 내 것인 줄 착각하고 교만하게 살았던 과거의 죄악을 회개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같은 기도를 계속했다. “주님, 헌신은 제가 했지만 이루실 분은 주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8) 밤샘 기도 끝에 ‘믿음의 제자’로 살 것을 결단세상 친구들과 노는 시간 줄어들고 ‘주님의 일’ 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입력 2015-08-26 00:11
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뒷줄 왼쪽 다섯 번째)가 1979년 여름 행사를 마치고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총무 서용원 목사(뒷줄 오른쪽 두 번째) 등 임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78년 8월 말 ‘농촌 초신자 수련회’ 저녁 집회가 끝난 후 나는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3층 채플실에 혼자 남아 밤새도록 기도했다. “주님, 헌신은 제가 했지만 이루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저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오늘밤 이 헌신이 훗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온전히 이뤄지도록 저를 붙잡아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하면서 밤새 부르짖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새벽녘이 되었을 때 내 몸은 소낙비를 맞은 사람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바지 뒷주머니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받은 돈 봉투가 있었는데 땀에 젖어 너덜거렸다. 양말에서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정도였다. 내 평생 첫 경험이었다. 내 힘으로는 이렇게 기도할 수 없었다.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날 밤 온 힘을 다해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신 것이다.
날이 밝아올 때 내 육신은 축 늘어졌다. 하지만 영혼은 한없는 기쁨과 감사로 충만했다. 세상 만물이 새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러웠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외모로 보이지 않고 영혼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견딜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용희야, 밤새 기도 잘했니? 참 기특하다.” 아침 식사시간에 1층 식당으로 내려가니 이대 다락방 총무인 서용원 목사님이 격려해 주셨다. 식사를 하는데 많은 분들이 어깨를 토닥였다. “이용희, 너 때문에 밤새 한잠도 못 잤어!” 내 기도소리 때문에 수련회 참석자 대부분이 잠을 못 잤다며 사랑어린 핀잔을 했다. 그런데 누구도 3층에 올라와서 나의 기도를 막지 않았다.
농촌전도를 다녀온 후 내 인생은 180도 변했다. ‘과거의 나로 살지’, 아니면 ‘새로운 전도자로 살아갈지’의 고민은 그날로 끝냈다. 그날 밤 주님께서 부어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제자로서 평생 살아가기로 결단했기 때문이다.
변화는 소비생활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대학생들은 A(Alcohol·술) B(Billiards·당구) C(Cigarette·담배) D(다방)에 대부분의 용돈을 지출했다. 나도 비슷했다.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물질을 이렇게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술, 당구, 담배를 끊었다. 다방은 성도 간 교제가 있을 때만 출입했다.
서강대 2학년 2학기 때부터는 이대 다락방대학생연합회 임원을 맡아 활동하기 시작했다. 성경을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며 시간 날 때마다 말씀을 읽었다. 옛날 습관과 언행을 교정하기 위해선 말씀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한번은 같은 과 친구가 다가와 이렇게 투덜거렸다. “용희야, 지난 한 달 동안 술을 한 잔도 못 마셨어.” “아니, 좋아하던 술을 한 잔도 못 마셨다니?” “내가 너 따라다니면서 술을 마셨잖아. 그런데 네가 갑자기 술을 끊으니 술 마실 기회가 없어진 게 당연하잖아.”
친구들은 나보고 “사람이 변했다”고 했다. 세상 친구들과 보내던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대신 예수 믿는 사람들과 주님의 일을 하는 시간은 대폭 늘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겪었던 방황도 끝이 났다. 이과에서 문과로 옮기고 마음 한편에선 늘 미련이 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문과로 옮긴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는데, 어느새 매사에 밝고 긍정적인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2학년 여름방학 때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이후 내 인생은 점점 새롭게 바뀌고 있었다.
(9) “1년 이상 선교사 헌신할 사람?”부르심에 벌떡10·26사태 뒤 어수선한 대학 시절 세계복음화대성회서 주님과 약속입력 2015-08-27 00:53
1980년 8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세계복음화대성회’ 현장. 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는 이 자리에서 단기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군대는 서강대 2학년을 마치고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1978년 여름부터 이대 다락방전도협회 일에 몰입하다보니 입대를 미루고 선교활동에 전념하게 됐다. 3학년 1학기 때는 이대 다락방전도협회 내 전도 모임인 ‘산돌’의 회장이 됐다. 많은 대학생들이 산돌에 와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온힘을 쏟았다.
믿음이 좋은 청년들은 성경공부 조장으로 세우고 조별 제자양육, 성경읽기, 기도를 강조했다. 교회를 다니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불신자 청년들이 산돌에 처음 나오면 예수님을 영접할 때까지 끈질기게 복음을 전했다. 주님의 은혜로 산돌은 부흥하기 시작했다.
80년 4학년 1학기 때 ‘이대 다락방 대학생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그때는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잊을 수 없는 시기다. 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계엄령이 선포됐고 모든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80년 봄이 되면서 학도호국단 체제가 사라지고 총학생회가 부활하기 시작했다. 유신정권 아래 민주화운동을 했던 학생들이 총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들이 주축이 된 각 대학 총학생회는 대학생들이 받던 집체군사훈련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대학가는 계속되는 시위로 격변기를 맞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갔고 마침내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번졌다. 곧바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이 시기 대학생들은 어둡고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이대 다락방 대학생 연합회장을 맡았기 때문에 남다른 고심이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사회 참여가 첨예한 이슈가 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도대원을 훈련시키기 위해 7월 초 농촌전도수련회를 가졌고, 7월 말에는 전국 26개 농촌 미자립 교회로 농촌전도대가 파송됐다. 전도수련회와 26개 농촌전도대를 섬기느라 6∼7월은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선교에 쏟아부었다. 여름 전도행사를 모두 끝낸 8월에는 거의 탈진상태였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중요한 부르심이 이때 있었다.
80년 8월 12∼15일 여의도광장에서 ‘세계복음화대성회’가 열렸다. 매일 100만여명이 운집했다. 나는 성회에 매일 참석할 생각은 없었다. 첫째 날은 첫날이니까, 둘째 날은 비가 와서 참석자가 없을까봐 참석했다. 셋째 날은 주변 사람들을 권하다보니 함께 가게 됐고, 마지막 날은 끝까지 참석하자는 마음으로 갔다. 그런데 사건은 성회 마지막 날 밤에 벌어졌다.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설립한 김준곤 목사님께서 여의도광장에 앉아 있던 수많은 회중을 향해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했다.
“1년 이상 선교사로 나갈 사람은 다 일어나십시오! 자신이 못 나가면 다른 사람을 1년 동안 선교사로 내보내고 후원할 사람도 일어나십시오!”
나는 군중 속에 앉아 있다 그날 강한 부르심 앞에 순종하며 일어섰다. 주님께서 인생의 1년을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시는데 피할 수 없었다. 80년 8·15광복절,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약속이 이날 맺어졌다. 이후로 나는 ‘선교사로 1년 이상 타국에 나가야 된다’는 부담을 안고 살게 됐다.
그날 밤 나처럼 1년을 선교사로 헌신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무려 10만명이나 됐다고 한다. 100만명 중 10분의 1이 선교사로 헌신한 것이다. ‘선교한국’의 첫걸음이 된 역사적인 밤 집회였다. 이때 헌신한 사람들이 지금도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헌신한 사람들을 잊지 않고 계속 찾아내신다. 그리고 주님과의 약속을 이루신다. 10만명 선교사 파송의 꿈은 한국교회의 기도제목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