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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이용희 교수 간증 22024-02-02 03:00
작성자 Level 10

[역경의 열매] 이용희 (4) 무의촌서 의료선교하던 큰형 사고로 숨져

가족들 아픔 속에서도 통곡 대신 기도… 부모님, 평안 가운데 흐트러지지 않아

입력 2015-08-20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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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가운데)가 중학교 2학년 때인 1972년 서울 신촌 대현교회에서 성극을 하고 있다.
1960년대 우리 집에는 친할머니와 부모님, 5남매가 함께 살았다. 시골에 계신 친척들이 무작정 상경하면 집에서 몇 년씩 머무르는 분들도 있었다. 그래서 늘 10명 정도가 함께 살았다.

65년 서울 북아현동에 있는 추계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돼 강원도 장성 조흥은행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부모님은 사택으로 입주했고 우리 5남매는 학교 때문에 서울에 남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했다.

추계초등학교는 사립학교였기 때문에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많았다. 당연히 부모들이 자녀의 학교생활을 세심하게 살폈다. 반면 나는 학교 준비물도 챙겨가지 못할 때가 많았고 열등한 학생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학교에선 말을 하지 않았고 내성적인 성격이 됐다.

집에 가도 부모님이 안 계시니 방과후학교 도서실에 남아 늦게까지 책을 읽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동화구연대회를 했는데 2등을 했다. 그 후로 친구들에게 동화를 자주 들려주면서 성격도 바뀌었다. 훗날 선교활동을 하면서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그때부터 쌓은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71년 경성중학교에 입학했다. 3년 내내 학급에서 대의원을 맡으며 학생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교회에선 중등부 회장으로 학생회 활동에 열심을 냈다. 교회 아이들과 ‘등대’라는 회지를 발간했고 ‘문학의 밤’ 행사도 개최했다. 성탄절 이브에는 밤새 모임을 갖고 새벽송을 돌았다. 

중학교 3학년이던 73년이었다. 여름방학 때 큰 사건이 일어났다. “용희야, 큰형이 죽었다.” “예? 큰형이 죽었다고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머리가 하얘졌다. 5남매 중 장남이며 종갓집 장손인 큰형은 고려대 의과대학 재학 중 농촌전도와 의료선교를 갔다가 강원도 영월군 삼옥리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이다. 

당시 큰형은 CMSA(기독의대생회)에서 전도부장으로 활동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농촌전도와 무의촌 봉사에 헌신했다. 큰형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과 기대는 각별했다. 큰형은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했다. 가족은 물론이고 집안의 많은 친척 어른들이 특별하게 생각했다.

부모님을 비롯해 우리 모두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마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 같았다. 

의료전도팀은 삼옥리에 배를 타고 들어가 교회도 없는 산골에서 한 주간 무료진료를 하며 어린이 성경학교, 축호전도, 주민전도집회 등 전도활동에 힘썼다. 큰형은 서울로 돌아오기 전 목욕을 한다며 강에 들어갔는데 홍수로 불어난 물살에 그만 익사하고 말았다.

부모님은 삼옥리로 달려가 강 전체를 샅샅이 훑으며 시신을 찾느라 애썼다. 어렵게 형의 시신을 찾아 서울로 이송했다.
뜨거운 햇볕이 내려쬐던 8월에 장례예배가 열렸다. 큰형의 시신과 영정이 눈앞에 있었다. 큰형의 죽음이 믿겨지지도 실감이 나지도 않았다. “형, 이렇게 가면 어떻게 해. 형….” 많은 분들이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주님의 위로와 평안이 장례의 모든 순서와 조문객들 가운데 함께했다. 통곡 대신 찬송과 기도가 흘러넘쳤다.

장례 절차가 끝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셨다. 많은 분들이 아버지, 어머니를 걱정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주님이 주시는 평안 가운데 흐트러짐이 없었다. 자신의 몸통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고통이 있었음에도 오히려 조문객들과 큰형의 친구들을 위로했다. 장례예배를 집례하던 목사님은 부모님의 담담한 모습을 보고 “신자의 본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5) 큰형이 의료봉사하던 시골에 기념예배당 건축

동료 의사들 훗날 국내외서 봉사… 둘째·셋째 형도 의료선교 활발히

입력 2015-08-21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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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2월 이화여대 졸업식에서 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 누나인 이종옥 권사(가운데)와 큰형(왼쪽), 사촌형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큰형이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했던 강원도 영월군 삼옥리에는 기념예배당이 세워졌다. 당시 삼옥리는 외진 시골 마을이었다. 서울에서 그곳을 가려면 버스를 3번 갈아타고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다. CMSA(기독의대생회) 전도활동으로 신도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예배당도 없던 그곳에 신도들을 위한 모임 장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삼옥리를 둘러본 아버지는 지역 유지들과 성도들, 큰형이 활동했던 CMSA 회원들과 함께 예배당 건축을 놓고 상의했다. 곧이어 모금활동이 시작됐고 아버지를 중심으로 지역 성도들과 회원들은 1974년 삼옥교회를 건축했다. 

큰형의 묘비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는 말씀이 새겨졌다. CMSA는 삼옥교회로 매년 농촌전도와 의료선교를 다녀왔고 교회가 잘 세워지도록 도왔다. 큰형과 함께 삼옥리에 전도를 갔던 의대생들은 훗날 의사가 되어 전국과 세계로 의료선교를 나가고 있다.

우리 집안에서도 의료선교의 열매가 맺혔다. 둘째 형은 고려대 의대를 졸업한 후 흉부외과 전문의가 되었고 케냐에서 1년간 봉사했다. 지금도 많은 나라를 다니며 단기 의료선교에 힘쓰고 있다. 가톨릭 의대를 졸업한 셋째 형은 농촌 지역에서 복음의원을 개원했다. 병원진료를 마치면 왕진가방을 들고 거동이 불편한 환자나 장애인, 독거노인 등을 직접 찾아가 무료로 진료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셋째 형은 신학을 전공해 목사 안수도 받았는데 의료선교와 지역선교를 병행하고 있다. 또 의대와 치대를 다니는 조카 네 명이 있는데, 모두 단기선교를 다녀왔고 의료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다. 

“강남으로 집을 옮긴다.” 아버지가 큰형을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오랫동안 큰형과 함께 살았던 서울 신촌 집을 떠나 74년 논현동으로 이사했다. 교회도 집에서 가까이에 있는 영동제일교회로 옮겼다.
그해 3월 나는 배재고에 입학했다. 배재고는 큰형이 다녔던 학교라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당시는 고교 입학고사 제도가 폐지되고 추첨으로 학교를 배정하던 첫해였다. 추첨을 앞두고 배재고에 배정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1차 배정 단계에서 지역학군이 아닌 배재고가 있는 공동학군으로 배정됐고, 2차 단계에서 약 30개 학교 중 배재고로 배정됐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특별한 기도응답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유도부에서 활동했다. 2학년이 되면서 이과를 선택했다. 수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연구소에서 우주물리학과 천체과학을 연구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3학년이 됐을 때 진로에 변화가 생겼다. 아버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용희야, 내가 볼 때 너는 이과보다는 문과 쪽이 더 적합한 것 같다. 네가 어렸을 때부터 독서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니. 또 교회에서 중·고등부 회장으로 각종 활동을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연구실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하는 문과가 적성에 맞는 것 같다.”

이후 어머니가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그리고 이과에서 문과로 옮기게 됐다. 당시에는 문과로 옮긴 게 별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훗날 선교단체 일을 하면서 이때의 방향 전환에도 하나님의 세심한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깨닫게 됐다. 문과로 옮긴 게 복음전파와 선교 공동체 운영, 동성애 합법화 반대운동 등에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6) 방황하던 대학신입생 때도 기독봉사 활동 계속

농촌전도 위한 수련회 마지막 날 “구원은 하나님 선물” 듣고 “아멘”

입력 2015-08-24 00:57 수정 2015-08-24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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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앞줄 가운데)가 1978년 7월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농촌전도팀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1977년 3월 서강대 경상대학에 입학했다. 당시는 계열별 입학이어서 3학년 때 경상대학에 소속된 경제학과 경영학과 무역학과 회계학과 중 1개 학과를 선택하게 돼 있었다. 고등학교 때 교복을 입고 통제된 생활을 하다가 대학에 입학한 후 갑자기 자유로워지자 입학 초기에 적응하는 게 힘들었다. 이과에 대한 미련도 남아 있어 대학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채 술을 마시며 방황하기 시작했다.

“부어라!” “마셔라!” “건배!” 신입생 환영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서강대 배재고 동문 신입생 환영회 때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얼마나 많은 술을 먹였던지 동기 중 한 명이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그렇게 1학년 때는 술에 취해 있는 날이 많았다. 술과 가까이 했지만 희한하게도 기독교 봉사 동아리만큼은 놓지 않았다. 동기들끼리 ‘스윙(SWING)’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서 영어회화 모임도 갖고 여성 시각장애인들이 사는 시설을 찾아가 봉사활동도 했다. 불우 청소년을 위한 야학에서 교사로도 봉사했다.

특히 대학생 선교동아리인 ‘산돌’에서 활동했다. 산돌은 고 김활란 박사님이 설립한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내 전도모임이다. 산돌 활동은 훗날 내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됐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그동안 참여했던 모든 동아리를 끊기로 했다. 그때 산돌로 나를 인도했던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용희야, 네가 새 학기 임원이 됐다. 네가 봉사부장으로 일 좀 해야겠다.”

‘하필이면 봉사부장으로….’ 다른 임원이면 거절했을 텐데 봉사부장이란 말에 차마 거절을 하기 어려웠다. 산돌 봉사부는 매달 넝마주이들이 몰려 사는 삼각지와 윤락여성들에게 기술훈련을 시키는 부녀보호소를 방문해 그들과 함께 교제하며 봉사활동을 펼쳤다. 

‘산돌은 한 학기만 하고 반드시 그만둔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 열리는 산돌 정기모임에 못 갈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한 달에 두 번씩 봉사활동은 꼬박 참석했다. 한 학기가 끝나가고 여름방학을 앞둔 때였다. 이화여대 다락방 총무였던 서용원 목사님이 나를 불렀다.

“용희야, 이번 여름에는 나랑 같이 농촌전도를 가자.” 선배들로부터 농촌전도에 다녀온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기 때문에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래, 여름방학 농촌전도를 끝으로 모든 봉사 모임을 정리하자.’

농촌전도를 가기 위해 7월 초 이화여대 다락방에서 열린 전도수련회에 참석했다. 전도수련회는 낮 시간에 전도훈련을 하고 밤에는 부흥회로 열렸다. 3박4일 동안 농촌전도에 필요한 것들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특히 부흥회는 분위기가 뜨거웠다.

마지막 날 저녁 부흥회 때 김홍도 금란교회 목사님이 강단에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 손을 번쩍 들어 올리십시오!” 나는 모태신앙이었지만 손을 들 수 없었다. 오래도록 교회는 다녔지만 지은 죄 때문에 천국에 갈 자신은 없었다. 누가 손을 들어 올리나 둘러봤다. 몇 몇 선배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김 목사님은 열변을 토해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피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입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구나.’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분명한 구원의 말씀이었다. 나도 모르게 외쳤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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