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연희, 효동 두 아이의 헌아식을 갖습니다. 저는 사실 헌아식이 두려운 사람입니다. 어릴 적의 두려움 때문에 그랬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 8일 되었을 때에 부모님은 저의 동의도 받지 않은 상태로 온 교우들 앞에 하나님께 바치는 헌아식을 거행했습니다. 누나를 낳고 3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자, 부모님이 아들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해서 가진 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한나처럼 자식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그런 서원기도에 제가 태어났다고 믿으셔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넌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다. 아무리 도망가도 넌 도망가지 못한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 어머니는 그 믿음 하나로 딴 길로 가는 저를 보시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나 봅니다. 부모님은 저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저를 힘들게 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부모님은 어릴 때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셨고, 제가 설교를 하도록 했고, 기도로 훈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모님의 신앙이었지, 저의 신앙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른 길로 가면 하나님이 나를 때리시지는 않으실까 두려워하기도 하였습니다. 부모님은 저에게 유아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훗날 성찬식을 할 때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성찬에 참여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할 때 마다 이것을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께 조용히 다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입교식을 했었습니다. (아마 교회에도 그런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오시면서 직분을 받았는데, 세례를 받지 않고 넘어가게 된 분들이 입니다. 그런 분들은 조용히 저에게 오셔서 말씀해 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이 바로 ‘내 신앙이 아닌 부모님 신앙으로 받은 것이다. 난 내 고백으로 세례를 받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한번 세례는 다시는 세례를 안 받는 것이 원칙입니다. 다시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내 고백으로 드린다는 고백이지만 , 그 전에 세례하실 때 역사하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마 김욱진 전도사님도, 연응준 집사도 이와 같은 고민을 해 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아세례 대신 헌아식을 하시겠다고 요청하셨습니다. 그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너를 하나님께 바쳤다”하면서 어떤 것을 결정할 때마다 고통주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결단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럼으로 헌아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부모님의 결단입니다. 아이를 신앙적으로 양육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물을 바르게 양육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헌아식의 의미입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에도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헌아식 하는 아이들을 우리들의 아이로 받아들이고 양육에 협력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공동체입니다. 자녀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부모들이 지지만, 2차적인 책임을 교회가 같이 짊어지고 가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헌아식이 연희와 효동이에게 부모님들에게 감사와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