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하신 후에 늘 목회지를 따라 움직이셨기에 이사하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늘 집에는 누군가가 함께 있었기에 어릴 때는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가 했습니다. 그래도 기억나는 집들은 다 학군이 좋았습니다. 연희동, 성산동, 서교동등 그래도 당시 한국을 이끄는 대통령들이 살았던 동네여서 그런지, 학교도, 교회환경이 나쁘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한참 목회를 하셨던 연희동의 교회는 목회가 잘 될 때, 아버지가 욕심을 부리시다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한참 교회가 커질 때, 무리하게 땅을 불하받았던 것이 무리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은 고스란히 집안의 어려움이 되었었습니다. 어머니가 쥐를 잡아 먹이신 때도 그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견디다 견디다 못해서 교회를 사임하고 나오셨습니다. 아버지가 개척하셨던 연희동의 교회를 그렇게 떠나고 옮기셨던 곳은 성산동이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추억은 너무 잘사는 아이들이 있었던 서교동과 육교를 하나 사이로 난지도쪽에 붙어있던 성산동 아이들의 차이였습니다.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극명하게 나누어진 아이들... 그리고 아버지의 교회에는 성산동의 교인들로 가득했습니다. 교회옆에 붙어있던 사택에서도 늘 다른 분들과 함께 있어서 학교 아니면 놀러 다니던 생각만 납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은퇴하시면서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거창한 집이 아닙니다. 전세얻을 돈으로 멀고도 먼 장안동의 집으로 이사한 것입니다. 거의 집안이 바닥을 칠때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 어머니가 지내고 계신 장안동의 집은 1978년도에 이사하셨던 집입니다. 주변은 쓰레기를 버리는 곳에 덩그란히 있던 집, 낡을 대로 낡은 집을 3백만원에 사신 집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처음으로 가진 집입니다. 너무 낡고 주변 환경이 좋지 않아, 아버지는 안사시려고 하는 것을, 어머니가 하나님께 들었던 특별한 음성 ‘이 집은 축복의 땅이다’라는 음성을 들으시고 사신 집입니다. 집을 사고 나서 거짓말처럼 집값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집값이 오를때마다 아버지는 이사하고 싶으셨습니다. 주변환경이 늘 최악이었기 때문입니다. 장마철만 되면 중량천이 범람해서 집은 잠기고. 지하실에 넘친 물을 퍼내는 것이 초등학교 6학년, 장남의 저의 몫이었습니다. 연탄은 늘 물에 젖었고, 쓰레기에서 나는 냄새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쓰레기 더미위에 오로지 서있는 하나의 섬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연탄을 아끼시겠다고 나무를 떼서 밥을 하셨습니다. 당시 서울에 나무를 떼서 밥을 하는 집이 몇집이나 되었을까요? 엄마는 그래야 밥이 맛있다고 하셨습니다. 엄마가 만드신 아궁이는 난로의 아랫부분을 잘라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버티셨던 어머니의 독함은 1983년도 재개발에 의한 건축으로 헌집주고 새집을 지으면서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새집에서 엄마는 우아하게 커피 마시는 꿈을 이루셨습니다. 변재무 장로님의 시집 ‘사막 위 집한채’를 읽을 때, 제 머릿속에 떠올랐던 집은 바로 장안동의 옛집입니다. 흔들릴 듯 무너질 듯 했던 그 집, 비가 새고, 넘어질 것 같았던 그 집에서 오남매가 자랐습니다. 그 집에서 독하게 버티셨던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그 집에서 버티고 계십니다. 아무리 이사하시라고 해도 하나님이 주신 집이기에 그 집에서 하나님을 만나실 생각인가 봅니다. 장안동의 집 한채는 지금도 우리 엄마의 희망처럼 서 있습니다. 그집이 희망인 것은 하나님이 같이 한 흔적 때문입니다. 20평도 안되는 그 집이 희망인 것은 거기서 아이들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집만 생각하면 눈앞이 흐려집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집한채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