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할 때, 집사람은 기숙사에 있었습니다. 간호대학 기숙사 답게 밤 10시 30분전까지는 무조건 입실하여야 하고, 그 이후로는 전화를 걸어도 쉽게 전화연결도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삐삐가 유일한 수단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든든한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집사람이 늘 어울리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친구는 은아. 다른 친구는 진영이었습니다. 은아 자매는 시골 목사님의 딸이었는데 성악을 해도 될 만큼 목소리가 좋았고 신앙도 좋았습니다. 공부 벌레인지라 일등도 거의 놓치지를 않았습니다. 진영자매는 놀기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그런 부류였습니다. 셋이서 붙어 다니면서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같이 밥도 먹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숙사에서 일하는 자매도 저의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저보다 어리고, 또 약간의 장애가 있었습니다. 전화를 연결해 주어야 하는 입장인지라, 너무 고마워서 몇번 인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밤 11시에 전화를 해도 싫은 내색 안하고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들을 했고, 간호사가 별로 되고 싶지 않았던 진영자매는 영국으로 떠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붙어 다니던 세명은 졸업과 동시에 만날 수 없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사람과 졸업 다음해에 결혼하였습니다. 들리는 말에 은아 자매는 시험을 봐서 제가 다녔던 신대원에 들어왔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생과 결혼을 하여 필리핀 선교사로 나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모두 20년 전의 이야기 입니다.
목요일에 방송국을 올라가는데, LA세계선교교회 최운영 목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혹시 사모님 친구중에 은아자매를 아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했더니, 자기 동생 와이프라고 말하면서 잠시 미국에 들렸는데 곧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0년만에 통화가 되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20년전 집사람과 속상한 일이 있으면 찾았던 느낌 그대로 통화할 수 있었습니다. 벌써 선교사로 나간지 15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20년만에 식사를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어투는 바로 선우학사(집사람이 머물던 기숙사 이름)시절로 돌아갔습니다. 서로 싸운 다음에 제가 여자 기숙사 앞에서 한정없이 기다렸던 부끄러운 이야기부터 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흘러 나왔습니다. 집사람이 열심히 하던 데누콰이어(치대, 간호대 합창단)를 속 좁은 제가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 두어야 했던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그랬습니다. 집사람이 치대생들과 노래하는 것이 싫어서 티를 냈더니 그만둔 것입니다.
놀라운 이야기는 셋 중에서 가장 놀기 좋아하고 뺀질거리던 진영자매도 사모가 되서 일산에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열심히 병원에서 돈을 벌고 남편이 개척교회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은아자매는 몸에는 선교사의 품격(?)이 느껴지는 기풍이 있었습니다. 가장 공부를 열심히 했던 은아자매는 딱 2년 간호사하고 그만두었는데, 나머지 두 사람은 지금도 열심히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오래가도 반가운 것은 있었을 때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보다는 격려하고 세워주는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이해관계라고 한다면 얼마나 피곤했을까요? 3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하면서 헤어졌는데, 마치 곧 만날 사람처럼 이야기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