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믿겨지지 않는 이별입니다. 오래 투병을 했기에 각오한 사실이지만 막상 닥치니 허무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의대를 다니셨기 때문에 누구보다 의학적인 지식이 풍부했습니다. 아니 어느 의사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을 정도로 의학적 지식이 풍부했습니다. 다른 분들에게는 의학적 충고를 했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그렇게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2012년 처음으로 교회를 나오셔서 교회를 결정하기 전 세 번을 만났습니다. 전도사님은 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인교회를 오래 다니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인교회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분당에 있는 할렐루야 교회 빼고는 가장 의욕을 가지고 사랑했던 교회가 우리 교회가 아닐까 생각되어 집니다.
전도사님을 너무 잘 아는 분들이 이런 말로 저를 웃기시곤 하셨습니다. “어떻게 욱진 형제가 그렇게 오래 한인교회를 다닐 수 있죠? 김목사가 대단한 겁니다” 어쩌면 목사님들은 전도사님의 올곧은 말씀을 부담스러워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도사님의 마음을 진짜로 알면 그렇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했고 예수님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은 따뜻한 표현을 잘 못해도 속이 깊은 분이셨습니다.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매우 중요한 일을 의논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교회를 사랑하셔서 하시는 말씀인지라 모른척 해달라는 부탁을 돌아가시기까지 지켜 주셨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장점만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했을 때 김욱진 전도사님의 신앙적 색깔은 동의할 수 없지만 김목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도와줘야지 하며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저도 부탁을 드리면서 과연 이 일을 해주실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마음을 바꾸었다고 말씀하셔서 “많이 바뀌었습니다”라고 했더니 “나도 나이가 먹나봐” 하며 웃으셨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 퇴원하면 우리 둘이 반반 섞어 놓자해 했더니, 건강해 지면 내가 사랑하는 동생목사 방패 될 거야 하셨습니다.
사무실에 들어오기만 하시면 이야기하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아프다는 분이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일날 보고 다음날 병원에 들어가 수술을 받아야 하는 와중에 아마존 다녀와 벌레에 물린 자리 때문에 고통하는 것 생각하며 약처방을 일부러 이상욱 장로님께 부탁한 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 잘 못하는 줄 아는지라 말도 제대로 못하는 목소리로 ‘약 처방받았냐’고 확인전화를 그 힘든데 한 사랑의 사람입니다.
소천하기 일주일전이 저에게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주일날 교회 가고 싶다는 그 소망을 들어주고 싶어서 정말 하나님께 끊임없이 매달렸습니다. 돌아가실 것 같다는 말씀에 한걸음 달려갈때 마음은 오로지 ‘하나님 하루만 더’였습니다. 그 하루를 기다리지 못하고 토요일에 갔습니다.
한 주간 천국환송예배 설교를 준비할 때 김인철이 되보기도 하고 김욱진이 되보기도 하면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보내는 예배를 준비하면서야 둘이 반쯤 섞어놓은 것과 같았습니다. 이제 또 사랑하는 한분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