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있을 때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교회를 대표하는 교단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기도하는 보수적인 교회들과 거리로 나갔던 교회입니다. 보수적인 교회는 보통 복음주의 계열이라고 이야기 했고, 밖으로 뛰쳐나가 구호를 외쳤던 교회는 복음적인 교회가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모습은 늘 저의 신앙적 갈등이었습니다. 왜 복음주의는 사회적인 문제에 침묵하는가 라는 것이었고, 왜 잘못된 것을 말하는 것이야 말로 복음적인 것인데, 복음적이다 말하지 않고 진보라고 말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갈등은 복음적인 것이 사회적일 수는 없는가 라는 고민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습니다.
감사하게도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그런 갈등을 풀기 시작했고 복음적인 사회속의 교회를 꿈꿀 수 있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젊은이들이 왔던 오렌지연합교회에서, 그들의 갈등은 신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교회는 24시간 교회 문을 어딘가에는 하나 꼭 열어 놓았습니다. 술마시고도 들어왔고 예수를 안믿어도 애찬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일에 오렌지 연합교회의 많은 어른들이 자신들의 불편함을 내려 놓았기에 가능했습니다. 복음이 청년들에게 스며드는 모습은, 인내하며 받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교회 와서 드디어 지역사회와 함께 가는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마틴초등학교를 위한 야드세일, 수학교실, 그리고 화요일마다 긍휼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제자였던 사회학을 전공한 형제가 교회를 방문했었습니다. “어떻게 복음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이 될 수 있지요? 그도 늘 보수적인 교회에서 침묵하라는 말만 들었기에 그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저는 복음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불의에 맞서는 것만이 사회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마땅히 사회적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싫어도 돈벌기 위하여 직장에 나가야 하고, 싫은 사람이 있어도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싫은 사람이 있어도 공동으로 사는 아파트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입니다.
일하기 싫은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처럼 힘든 것이 없습니다. 이곳은 안돼, 하루 빨리 직장 그만두어야지, 빨리 이사 가야지 ... 그런 생각으로 산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해도 안 바뀌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맞추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작은 가정부터, 교회, 지역, 사회가 모두 우리에게는 세상입니다.
올해 표어가 “세상을 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떻게 세상을 품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있는 그 자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해야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인사 안하는 가로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을 품고 가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가나안교회 성도들과 세상을 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참 좋은 교회, 좋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부족한 사람 지금까지 안고가셨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올 한해도 이쁘게 봐 주시고 같이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