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수양버들 춤추는 길에’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70년대 노래이니, 지금으로부터 50여년이 지난 노래입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수양버들 춤추는 길에 꽃가마 타고 가네 열 아홉살 새색시가 시집을 간다네’
우리 어른들은 이 가사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오래전에 결혼식을 하면 신랑은 나귀타고 신부는 꽃가마타고 시집을 갔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통이 7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에는 남아있어 아마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그렇게 시집을 갔던 분이 계셨습니다. 일제시대 꽃다운 10대에 얼굴한번 뵙지 않고 시집갔다고 합니다. 정말 두렵고 떨려하며 울면서 갔다고 하는 분은 바로 지난 목요일 오후 2시에 소천하신 윤귀례 권사님이십니다. 권사님은 꽃가마 타고 시집간 마지막 세대입니다. 그리고 93년을 사시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꽃가마 세대인데, 한국에 계셨을 때는 어디까지가 본인의 땅인지도 모를 정도로 부유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일제시대이지요. 평생 폼잡고 사셨던 것이 윤귀례 권사님의 돌아가신 부군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오셨습니다. 흥이 많고 노래를 좋아하셨던 권사님 이셨습니다. 어느 해 효도관광으로 샌디에고를 다녀오다가 노래한가락 부르시라고 했더니 구성지게 부르시는 폼이 예전에는 정말로 노래를 잘하셨던 것 같습니다. 오죽 했으면 자녀들이 교회에다가 가라오께를 다 사다 놓으셨을까요? 다행히 하나님께서 가요를 좋아하는 제가 실수할까봐(?) 미리 치워놓으셨는지 찾을 수가 없었는데, 가끔 자녀들이 교회에다가 설치해 놓은 가라오께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런 권사님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가나안교회의 교인들이 40명 정도로 줄었던 어느 해에 예배를 드리시다가 “다 어디갔냐고” 하시며 우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나아졌음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교회 성가대의 찬양을 들으시면서 “조금만 젊었으면 성가대 올라갈텐데.. 성가대 올라갈텐데”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권사님은 악보를 보실 수 없으셨습니다.
90이 넘으셨어도 교회를 빠지지 않으시던 권사님이 작년부터는 한 달에 한번 나오시는 것도 힘들어 하셨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주 권사님처럼 눈이 안보이기 시작하더니, 청력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 하나 질병이 생기시더니 만나면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이 왜 안데려 가시는지 모르겠어”하셨습니다.
만날 때부터 말씀하셨던 손주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손주, 똑똑할 뿐만 아니라 착하다고 늘 자랑하던 손주가 변호사 시험을 볼 때마다 기도부탁을 하셨는데, 매번 떨어졌었습니다. 작년 12월에 교회에 일부러 오셔서 “목사님 기도하는지 안하는지 모르겠어”하셨습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이번에 손주가 떨어지면 목사님 책임이라고 협박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얼마 지나지 않고 권사님이 처음으로 저에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손주가 변호사 합격했다” 기도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말이었습니다.
전화하신 기록이 정확히 작년 11월 27일 오후 6시입니다. 그리고 정확히 4개월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그런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실 수 있어서 말입니다. 자녀들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손주 성공보기 위해 눈감지 못하고 사셨던 인생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