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들은 목사의 나이에 비례한다는 말을 들을 때, 한귀로 흘려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선교단체에서 모셨던 목사님이 당시 청년들에게는 어마어마하게 영향력을 미쳤던 분이었는에 이분이 40대 중반이 넘어가자, 더 이상 젊은이들이 자신을 불러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90년대 학복협을 주도했던 목사님의 이름은 더 이상 코스타 같은 학생집회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제 나이 52세가 되었습니다. 젊은이들과 평생 같이 할 줄 알았는데, 이제 젊은이들은 제 아들의 또래입니다.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제가 나이를 먹어감과 동시에 교인들의 연령도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정말 복음적인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2015년 2월에 발표한 유엔의 연령대 구분이었답니다.
이전에도 UN에서는 연령대를 구분하여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랫 동안 나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었습니다. 1956년도에는 65세 부터를 노년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은퇴는 65세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의학의 발달, 삶의 질의 변화에 의해서 평균수명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선진국들은 저출산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고 건강한 어른들이 은퇴를 미루고 일들을 하시면서 사회적인 연령대의 불균형이 이루어졌습니다. 얼마 전 20대보다 60대가 직업을 더 많이 갖고 있다는 발표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2015년 2월 7일 UN은 무려 62년 만에 다시 연령대 별로 어디부터 노년이라 할 것인가를 발표했습니다. 인류의 체질과 평균수명 등을 고려해 생애주기를 5단계로 나눈 것입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0세에서 17세까지를 미성년자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청년의 기준입니다. 18세부터 65세를 청년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66세부터 79세를 중년, 그리고 80세부터 99세를 노년, 그리고 100세 이후를 장수노인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와우!
이 통계를 보는 순간 우리교회는 확 젊어졌습니다. 65세를 기준으로 65세가 아직 안되신 분들을 보니 교회가 젊디 젊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중년들도 넘치는 교회입니다.
연령에는 생활연령과 주관적 연령이 있습니다. 주관적 연령은 본인이 스스로 느끼는 나이입니다. 우스게 소리로 뒤에서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라고 부르면 자신을 부른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그것이 주관적 나이입니다. 65세가 넘은 분들은 노인의 규정을 75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75세 되신 분들은 본인들이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가는데 가장 나이가 많으신 분은 50대로 보이는 분입니다. 총기도 용모도 그렇습니다. 예전 같으면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80이 넘으신 분이 몇 분이 가십니다. 굳이 UN의 발표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이 젊어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청춘은 사실 나이가 아니고 생각인 것이 맞습니다. 사무엘 울만이 ‘청춘’이라는 시를 쓸 때의 나이가 78세 였습니다.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가나니
70이 넘은 나이에 성지를 가겠다는 청춘들이 이상을 잃지 않고 더 멋진 꿈을 가지고 돌아오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