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오십니다. 한번 오시려 해도 건강이 허락지 않으셨고, 아버지가 불편하셨기 때문에 오시지 못했습니다. 딸과 아들이 다르다고 합니다. 누님이 미국에 있을 때는 6개월씩 계시곤 하였는데, 제가 미국에 온 이후로는 한 번도 오시지 못하셨습니다. 갑자기 오시게 된 이유는 이쁜 막내며느리 때문입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 막내며느리가 다니는 병원에서 조의금을 전달했는데 사실 저희 부모님은 장례를 치루지 않았기에 조의금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며느리 입장에서는 병원이라는 특수성속에 받은 조의금을 돌려준다는 것은 조직문화를 힘들게 할 수 있기에 어떻게 못하다가 이번에 막내가족과 어머니를 모시고 미국을 방문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제 여동생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여동생까지 같이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짧은 여정입니다. 미국에 머무는 날은 정확히 8일입니다. 85세 되신 어머니께는 아주 무리한 일정입니다. 비행기를 바꾸라고 말씀드려도 안된다고 하십니다.
사실 어머니에게 이렇게 오시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저는 부모님을 모시고 3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독립한 이후로 어머니는 단 한번도 저희 집에 오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아무리 오시라 해도 가능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어머니의 방문은 19년만의 아들집 방문입니다. 저희 집사람이 못한 것도 아닙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매주 부모님께 방문하였기에 그럴 수도 있지만, 제가 아는 한 그건 어머니의 자존심이었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사셨습니다. 안보면 안보지 굽히는 것을 모르셨습니다. 어머니도 저도 그 자존심 하나로 버티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며느리가 일을 해도 제 등록금은 어머니가 준비하셔서 주셨습니다. 저는 신대원을 다닐 때 어머니 등록금으로 다녔습니다. 그것 또한 어머니의 자존심이기에 그대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저의 자존심이기도 했습니다.
엄마의 평생 기도는 제가 목사 되는 것이었습니다. 방탕한 자식처럼 술에 쩔어 살아도, 공부는커녕 엉뚱한 것에 마음을 쓰고 있을 때에도 어머니는 늘 제가 목사가 되길 기도하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저를 부르셨지만 마치 어머니의 기도에 끌려가듯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아들이 목회하는 곳을 딱 한번 같이 예배드리는 일정으로 옵니다. 어머니를 만날 설렘에 잠을 못이루고 일정을 잡다보니 눈물이 나곤 합니다. 사실 못난 자식이 어머니랑 이번이 처음 여행입니다. 목회에 미친 아버지는 이박 삼일로 처음 갔던 가족여행을 단 하루만에 돌아오셨습니다. 개발되기 전에 청평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랑 기차를 타고 갔던 길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갔다가 텐트치고 반나절 놀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번에 같이 여행을 가면 엄마와 처음 여행입니다.
“엄마 이게 우리 처음여행인 것 알아? 이번엔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쓰고 그렇게 할 거야” 저는 압니다. 아마 엄마는 본인 쓸 것도 준비하고 오실 것을 말입니다. 아들 집이라고 그냥 오시지 못할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입니다. 마지막일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김인철 목사는 어른들에게 잘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제 부모님에 대한 저의 못남 때문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 뵈면 마음이 짠한 이유는 제가 그렇게 못난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저와 엄마가 편하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어느 교인과의 식사약속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짧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건강도 넉넉지가 못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가 어머니에게는 자식에 대한 부담으로 작용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 형제들이 특송합니다. 그때 평생을 그렇게 사셨던 엄마가 “예수님 저놈들 보니 나 괜찮았지요”하시며 위로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