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이 울 때 같이 우는 것, 그 주인공이 본인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감정이입이라고 한다면, 울고 있는 주인공의 그 울음을 이해하는 것이 공감입니다.
제 막내아들에게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해하는 공감능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누가 울면 울 수밖에 없는 것을 잘 이해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막내아들은 늘 행복하여 잘 웃는 편입니다. 웃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낄낄거리며 웃는 일을 잘합니다. 이것도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예준이가 웃으면 얼마나 그림이 이상하겠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예준이가 웃는데 제가 그것을 공감못한다면 저는 아이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일 겁니다.
막내 아이가 요즘 Water pole 를 합니다. 대단히 힘든 경기인지라 집에 돌아오면 피곤하다고 말할 때가 종종있습니다. 이녀석이 지난 금요일에 시합이 있다고 하고는 밤 10시가 되도록 연락이 없습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습니다. 저에게 문자를 했는데 제가 못본 것입니다. (제 전화는 문자가 와도 카톡이 와도 왔다는 표시나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해 놓았습니다. 혹이나 교인들이 보내셔도 못보는 이유는 거의 시간을 정해놓고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확인된 문자가 세 개 와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지금 맥도널드에서 코치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데리러 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답이 없으니 두 번째 문자후 20분에 보낸 문자는 지금 걸어간다라는 것입니다. 아이는 나름대로 그 늦은시간에 아빠보고 데리러 오라는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전화하면 될텐데, 전화하면 혼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늦게 확인하고는 전화를 했습니다. 아이가 지친목소리로 전화를 받고는 “아빠 내가 계속걸어서 집에 갈까 아니면 아빠가 올래?” 라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빨리갈테니 천천히 걸어와라” 급하게 차를 몰고 아이를 데리러 갑니다.
저도 피곤한 금요일 밤 10시 30분...
다큰 고등학생이 2마일을 걸어오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이겠습니까 만은 그날은 왠지 아들의 마음이 저에게 감정이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태우고 오는데 “오늘 힘들었어?” 하는데 그 한마디에 아이는 금방 기가 살아나서 “한번은 이기고 한번은 게임에 졌어” 하고는 아니나 다를까 게임에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또 다시 깨어진 공감...
교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배우자를 사랑해야지 하고는 어떤 액션을 취했는데 그 다음에 일어나는 정말 공감하기 쉽지 않은 미운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고 사랑하기로 했는데 그 보기 싫은 한마디에 깨진다는 것입니다. 공감은 내 상태에 따라서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합니다. 목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공감능력입니다. 기도하는 바는 내 상태와 상관없이 공감능력을 갖추고 싶습니다. 답을 말해주기 전에 먼저 공감하고 같이 울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중보기도를 하면 감정이입이 되어 환자처럼 기도하고 아파하고 그러는데, 다른 사람의 아픔에 있는 그대로 들어주고 공감하려면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