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우리 엄마가 우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기도할 때 외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도 엄마는 거의 눈물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제가 군대를 가게 될 때도 엄마는 우시지를 않아 “다른 엄마들은 아들 군대 보내면 그렇게 우신다는데..”하며 섭섭해 했습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들어가는 날, 차 타는데까지 배웅하시고 “잘 다녀오라"고 말씀하시고는 엄마가 아버지 품에 안겨 우시는 것을 뒤돌아 보았을 때 보았습니다. 우리 엄마가 저렇게 우시는 구나...
거의 모든 훈련소에는 눈물고개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고개를 넘어가려면 얼마나 힘들게 만드는지 오리걸음으로 걷다가 다시 뒤돌아 가게 했다가 거의 온몸이 죽을 지경이 됩니다. 그때 훈련소 조교가 “어머니 은혜”를 부르며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것 감정적으로 힘들게 만들고 하는 것인줄 알지요. 그런데, 정말 눈물이 쏟아집니다. 눈물이 쏟아지면 아무리 힘들어도 눈물고개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날 밤 부모님께 편지를 쓰게 합니다.
힘든 이야기 대신 잘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특히 사격을 잘했던 이야기를 아주 장황하게 썼습니다. 엄마가 얼마나 내가 사격을 잘하는지 자랑을 하셨는지 어떤 분은 내가 사격 국가대표 선수나 되는 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군대를 안가도 되는 평발인 저는 훈련소 내내 오래 걷기만 해도 갈라지는 발 때문에 군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생고생을 한 것입니다.
갑자기 끌려온 훈련소 내내 갈등하며 지냈었습니다.
마지막 훈련이 끝나는 날이면 가족이 면회옵니다.
원하는 것을 보내라 할 때 ‘엄마가 해주는 이북 만두’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오실 줄 알았던 엄마는 너무 몸이 아파 못오시고 아버지와 누나가 왔습니다. 엄마는 그 아픈 몸으로 만두를 새벽부터 빚으셨다고 합니다. 배가 터지도록 먹었는데도 계속 해서 배가 고팠습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랬나 봅니다. 아프시다고 하니 걱정도 너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이 보내셨는지 다 먹을 수가 없어서 나중에 옆에 있던 동료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데모하는 사람들 앞에서 두꺼운 옷을 입고 고생하는 아들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시더니 저를 결국 올림픽 경비대로 뽑아 주셨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좋은 만남, 훈련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사는 유일한 행정병 5명중에 들어가 늘 책보고 교육하러 돌아다니며 훈련하지 않고 걷지 않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엄마의 기도는 늘 저를 끌고 다니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 엄마의 20대 사진을 확대해서 쳐다보고 또 쳐다보며 울다 웃다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엄마와의 기억이 스쳐 지나갑니다. 늘 희생하시는 엄마는 돈을 보내면 늘 그 돈을 모아 다시 보내십니다. 아니 더 보내십니다. 이젠 같이 가도 같이 드실 음식도 많지 않습니다. 많이 드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쁜 옷을 사드리고 싶어도 이젠 엄마가 입을 수 있는 스타일의 옷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엄마는 여전히 이쁘십니다. 늙어 허리가 아파 힘들어 하시고 무릎 때문에 고통하셔도 여전히 우리 엄마는 강하십니다.
어머니 날! 딱 비행기 타고 엄마와 함께 하루라도 보내다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