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사우나가 유행입니다. 시설이 잘되어 있음은 물론 잠까지 잘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사우나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동네에 있었던 것은 목욕탕입니다. 목욕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목욕탕에 한번 가서 몸을 불리고 때를 미는 것은 있는 집의 호사같은 것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목욕탕 가는 집은 정말 잘사는 집이었고, 당시 제 친구들도 목욕탕에 가보지 못한 아이들이 태반일 때입니다.
목욕탕이라는 곳을 처음 가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입니다. 목욕탕은 원래 아버지와 같이 가는 곳이라 하는데, 저는 같이 집에 살던 ‘강학기’라는 형과 함께 같이 갔었습니다. 형은 당시 서울국립합창단원이었고 생긴 것이 정말 잘생긴 멋쟁이 였습니다. 형이라 부르기에는 나이차이가 20살이 넘게 났습니다. 저희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니 저도 형이라 부르기는 했지만 참 어려운 형이었습니다.
형이 교회에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부르면 온 교인들이 울고 웃을 정도로 참 멋졌고, 총각이었던 형은 어린 저에게도 참 매력있는 분이었습니다.
형이 어느날 무슨 생각이었는지 저와 목욕탕을 간다고 합니다. 참 부끄러웠습니다. 남들앞에서 벌거벗는 것도 부끄러웠지만 그보다는 몸에 때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안간다고 버팅기는데 엄마가 이 기회에 한번 갔다오라고 미십니다. 아마 형이 돈을 낸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들어간 목욕탕! 부끄러워 탕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형이 못들어 가게 합니다. 씻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형이 저의 때를 밀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밀고 밀어도 때가 끝없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형이 결국 한말 “좀 씻고 다녀라”했던 그 말에 얼굴이 빨개지고 부끄러워 그때 저는 빨리 목욕탕을 나오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저에게는 20대가 되기 전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간 목욕탕 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어떻게 해서든지 강학기 형을 피해 다녔습니다. 목욕탕을 다녀와서 형이 엄마에게 “너무 때가 많아서 다른 사람에게 챙피했다”라는 말을 하는 것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집이 장안동으로 이사 오게 되면서 학기형네도 더 이상 우리 집에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집에 온 적이 있지만, 제대로 마주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3주전 교회 사무실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가 된 이후로 “인철아”라고 불리운 적이 없는데, “인철이니?” 하고 물으시고는 “나 학기형이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놀랬습니다. 20대 이후로는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90년대 오셔서 텍사스에서 목사로 계시다가 은퇴하셨다고 합니다. 늘 멋진 형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70이 넘으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늘 불충한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제대로 인사를 못했는데, 아버지 소식 들으려고 애쓰셨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아버지 성함을 치니까 작년에 제가 썼던 칼럼이 뜨더랍니다. 그래서 저의 전화번호를 알았다고 합니다. 형은 늘 아버지에게 빚진 자식이었습니다. 아버지 처음 목회하시던 곳의 교인 아들이었는데, 서울에 오셔서 가족처럼 데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형과의 추억은 사실 목욕탕외에는 별로 없는데, 형도 그랬는지 “너 나랑 목욕탕 갔던 것 기억나니?” 라고 물으셨습니다. 어떻게 그 40년전의 일을 잊어버리겠습니까? 가난했던 시절의 추억이지요. 그때는 부끄러웠는데, 40년이 지난 후에 형과 대화를 하다보니 그날의 추억이 따뜻함으로 다가옵니다. 지나고 나면 훗딱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언제 40여년전의 일이 추억으로 다가올 줄 알았었나요. 그리고 부끄러운 기억도 형과의 대화에서는 추억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추억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