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김차랑 집사님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 때의 일입니다. 그때 김차랑 집사님은 30대 후반의 멋쟁이셨습니다. 길거리를 다니면 여자분들이 힐긋하고 볼 정도로 멋진 외모를 가진 분이셨습니다. 한동안 출판사를 하실 때 정말 잘 나가셨습니다. 30대에 이미 집을 장만하고 돈 쓰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집사님은 아주 오랫동안 교회 재정을 맡으셨습니다. 계속해서 맡으신 이유는 그분이 워낙 입이 무거우셨기 때문입니다. 사임하셨다가도 교회의 부탁으로 다시 재정담당을 하셨고 아주 이른 나이에 교회 안수집사가 되셨습니다. 아내 되는 양순임권사님은 늘 교회 일을 열심히 하셨고 젊은날 일찍 성공했다 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삶이 잘 흘러갈 줄 알았는데, 한 두 차례 언론통폐합등을 거치면서 대학교재를 만들던 출판사가 어려워지고 그러시면서 집사님도 갑자기 어려워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몇 차례 이사를 하시더니 더 이상 서울에서 살기 어려워지시면서 지방으로 이사를 가셔야만 했습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어려워지셨지만 두 분 다 열심히 사셨고 세 아이모두 열심히 공부하며 잘 성장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김차랑 집사님과 어렵고도 가까운 관계가 된 것은 그분의 첫째따님과 교제를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처음에는 비밀로 하던 연애였지만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집으로 초대를 하셔서 서울에서 1시간여 떨어진 광릉네의 집을 찾았습니다. 그때 저는 뭐든지 할 수있다는 자신감 하나로 똘똘뭉친 철없는 사람이었습니다. 90년 스쿠프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스포츠형 차(사실 내구성은 정말 형편없었습니다)를 몰고 다닐 때였습니다. 폼만 살아있던 시절입니다. 처음 초대되어서 곰국을 먹었습니다. 사실 곰국을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잘 보이려고 열심히 먹고, 또 달라고 하니 정말 좋아하는 줄 아시고 양순임 권사님이 갈 때마다 아주 오랫동안 늘 곰국을 많이 끓여 주셨습니다.
말씀을 많이 하시면 좋을텐데, 그렇지 않으셔서 어려웠지만 늘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김차랑 집사님께 참 많은 큰소리를 쳤습니다. 광릉네의 집을 보면서 “저는 아주 큰 집에서 살겁니다. 따님에게 큰 집에서 호강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요즘 겉을 유리로 만드는 집에 관심이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호기를 부렸습니다. 예수님 사랑하는 가정이지만 집안에 목사가 나오는 것을 너무 싫어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너무 강하게 만나서 교회 일에 미치기 시작하자 가장 불안해 하신 것이 제가 신학을 공부할까 였습니다. “신학은 아무나 하나요?. 저는 절대로 안갑니다”라고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미국을 방문하셨던 2012년에 딸네집에 왔다가 가셔서 암이 있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미 많이 진전된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참 오래 끗끗하게 잘 견디셨습니다. 6년을 치료도 안받으시면서 잘 이겨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가 사위인지라 하나님이 그 기도 받으셔서 약 안 먹어도 오래 산다고 자랑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홀로 화장실을 가시고 모든 것을 잘 견디시다가 김차랑 집사님이 어제 토요일 7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장인어른의 성품을 꼭 닮은 아내와 살며 다시 한 번 좋은 만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노회 전에 돌아가신 것도 감사하고 마지막날 딸과 통화하는 시간을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열흘정도 한국에 다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