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3남2녀를 두셨습니다. 막내 동생과는 일곱 살 차이가 나고 위로 누나와는 네 살 차이가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남매가 어릴 때 나누었던 추억이 많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던 누나에게 키타를 선물받고, 모래내 뚝을 걸으며 가요를 배웠습니다. 양희은의 노래를 초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부터 듣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연희동, 성산동등지는 우리 오남매가 같이 울고 웃던 동네입니다. 방이 한 개일 때는 아버지, 어머니가 위에서 주무시고 삼단요라는 곳에서 오남매가 아주 오랫동안 지냈습니다. 방이 두 개일때는 부모님 한방, 누나, 여동생이 같이 쓰고 남자들은 마루에서 혹은 다락에서 지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내 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같이 살던 식구들이 뿔뿔히 흩어지기 시작한 것은 군대를 가면서 부터입니다. 군대를 가있는 동안 가족들이 모이는 것은 쉽지 않기 시작했고, 제대하던 1989년도에 누나와 막내 동생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둘째 남동생이 필리핀으로, 방글라데시로 주재원으로 나가면서부터 가족들이 다같이 모이는 날이 없어졌습니다. 내 결혼식에도 온 가족이 모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998년도 어느 가을에 온가족이 8년만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남동생이 필리핀에서 돌아오고, 누나네가 미국에서 돌아왔습니다. 어렵게 시간을 내서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날 남동생은 다시 필리핀으로 떠났고, 가족들은 다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2008년도에 다시 한번 모여 사진을 찍었습니다.
평생 늘 같이 있을 것이라 여겨졌던 형제들이 한번 같이 만나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되었습니다. 제가 미국으로 들어온 후에, 저희 가족이 한국에 나가면 그때는 다 같이 모입니다. 조카들도 생겼고 나이가 드니 형제를 챙기는 마음도 더 깊어졌습니다. 나이가 들면 가족이 더 그리워 집니다. 이쁘던 누나의 연약한 모습도, 여동생이 시집안간것도 마음이 아픕니다. 남동생의 사업이 잘 안풀리는 것도 힘이 듭니다. 곁에 있지 못하고 힘이 되주지 못하는 아픔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만나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이년이란 시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번주 목요일 군대갔던 아들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선교갔던 딸도 13일이 되면 돌아옵니다. 온가족이 모여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은 20일 정도일 것 같습니다. 아들은 다시 복학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올라가고 딸도 이젠 얼굴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오래전 칼럼에 가족이란 떨어지면 보고 싶고 막상 만나면 시시한 관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의 이야기가 아니고 돌아가신 최인호씨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들이 온다는데 너무 설레입니다. 그러나 이 설레임도 막상 공항에서 한번 허그하고 나면 바로 시시해질 것입니다. 늦잠자면 다시 잔소리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인 것 같습니다. 곧 떠날 것을 알면서도 기대하게 됩니다. 이 기대, 이 설렘은 평생 갈 것입니다. 예석이는 늘 전화를 짧게 하는 아빠가 불만입니다. 그녀석이 제 마음을 알까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 엄마가 아버지가 저에 대해서 그랬다는 사실도 이젠 알아갑니다. 아들이 그리운데, 더 마음 깊숙한 곳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엄마가 그리운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