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아들이 학교를 가지않고 집에만 있다보니 모습이 바뀌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징그러워 지는 것입니다. 에너지 넘치는 고등학생이 답답하고 미치지 않는 것이 고맙기는 한데 그 모든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푸는 것 같습니다. 늘 보면 입에 무엇인가 들어가 있는 듯합니다. 살이 붙고 얼굴이 커져 갑니다.
어느날 누워 자는 것을 보니 거인이 누워 자는 것 같은 착각도 느껴집니다. 그런데, 정말 징그러운 것은 수염을 안 자르는 것입니다. 분명 좋아하는 운동선수나 누군가가 수염을 안자르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해도 갑니다. 얼굴 씻는 것은 괜찮은데, 참 귀찮은 것이 있다면 수염을 깎는 일입니다.
성경에 수염을 잘랐다는 표현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창세기 입니다.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창41:14)
감옥에 갇혀있는 요셉이 바로왕의 부름을 받자 수염을 자르고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략 4천년 전의 일이니 수염을 기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때도 어쩔때는 면도를 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염을 길렀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사장들은 수염을 길러야만 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슬픔을 표시할때 머리를 밀고 수염을 깎을 수 있었지만, 제사장들에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을 보면 구렛나루를 길러 꼬아 내려 뜨리고 턱수염은 기릅니다. 그리고 검은 옷에 정수리만 덮는 모자를 씁니다. 동방정교회(그리이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등의 사제들도 수염을 기릅니다. 동방정교회와 서방교회(캐톨릭)이 나누어 싸우게된 이유 중에 수염을 길러야 하느냐 잘라야 하느냐 문제도 있었습니다.
조선은 어땠나요? 상투는 어른됨의 표시였고, 수염을 기르는 것은 부모님에 대한 예의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일제에 의해 상투가 잘려나갈 때 조상들에게 불효하였다 하여 자살을 하는 분들까지 생겼다 하니 수염이 갖는 의미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예전 같으면 “절대로 안된다. 지저분하다 깨끗하게 면도해라” 이야기 하고 싶은데, 저를 생각하면서 참게 됩니다. 저도 4월 초에는 며칠째 면도를 하지 않은채 교회를 나가 있을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볼사람도 보여줄 사람도 없다 생각하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창세기 성경공부도 찍고, 새벽예배도 나가면서 다시 면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에게도 시간을 주려고 합니다. 이녀석 수염을 기른 모습이 멋있게 보이지는 않는지 Zoom으로 하는 성경공부에 본인은 얼굴을 안 내보내고 목소리만 내보내고 있습니다. 사진을 몇장 찍었습니다. 그것도 훗날 2020년의 추억이 될 듯합니다. 우리 삶에도 과거의 흔적이 있습니다. 수염처럼 잘라내야 하는 것을 계속해서 길러내는 것이 있는가 씁씁하게 지저분한 아들의 턱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은 면도를 더 깨끗하게 하여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