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하면서 수많은 분들과의 이별이 있었습니다. 한국을 떠날때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때는 다시 돌아가면 만나지 생각했는데, 세월이 지나도 그 기회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10년을 목회한 교회에서 유학을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동부로 가는 일들을 계속해서 경험했습니다. 그때는 저를 떠나는 이별입니다. 상황때문에 할수 없어 떠날때는 눈물이 났습니다. 그러나 목회하다가 저를 싫어해서 떠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눈물이 아니고 가슴에서 피가 나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아직도 잘 못하는 것이 있다면 이별입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서 저보다 더 나이가 많으신 분들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첫 이별이 2008년도 김영자 권사님의 부군이신 김만석 선생님을 보냈습니다. 아프신 분을 한주에 한번씩 뵈었기 때문에 마음에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후로 보내신 분들은 늘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냈습니다. 처음으로 전혀 준비하지 않은채 ... 단 한번도 돌아가시라 생각하지 못한 이별을 이번에 했습니다. 손석길 집사님...
교회 청소봉사를 하셨었습니다. 청소를 하실때 때때마다 in n out버거를 사오곤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일하시는 어른이 사오시는 것이 마음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집사님의 성품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퍼주고 나누는 것이 익숙하신 분입니다. 그런 성품이시기에 어디를 가든지 오랫동안 다른 분들과 함께 하실 수 있었던 분입니다. 빌딩 청소를 오랫동안 하셨는데 나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사람들이 인정했던 이유는 성실과 친화력 때문이었습니다. 몸은 비록 작았지만 씀씀이나 마음씀은 누구보다 넉넉한 분이셨습니다. 집사님과 친해진 이후로 집사님은 저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셨습니다. 교회 봉사하시는 일을 중단하신 이후에 더 편하게 식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어느새 그렇게 9년이 지났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집사님은 더 건강하신 것 같았습니다. 아프신 데도 없으셨고 잔병치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랬던 분입니다.
사람들과 식사하는 것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천국으로 보내는 날, 손자들의 마음에도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집사님은 밥을 같이 먹음으로 식구가 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집사님이 잘 가시는 식당이 있습니다. 식도락, 한양설렁탕입니다. 특히 한양설렁탕은 권사님과 집사님이 참 즐겨 찾으시던 곳입니다. 장례식때 권사님께 다가오신 분들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내가 자주 같이 밥먹을께요”
제가 한 말씀도 “권사님 우리 밥먹어요”
좋은 흔적을 남기시고 가셨습니다. 퍼주고 나누어 주는 삶을 살다가신 손집사님... 작았던 키가 오늘은 왠지 크게 다가옵니다. 그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작은 거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