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본받고 싶은 어른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목사님 이셨는데, 어느날 그분의 설교하시는 모습을 처음 보고는 멋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어머니의 꿈은 제가 목사가 되는 것이었기에 제가 그분을 따라 흉내내고, 설교하는 흉내를 내면서 손을 들곤 하는 모습을 보고는 닮았다고 칭찬하곤 하셨습니다. 심심하면 강단에 올라가 목사가 된 것처럼 소리를 지르곤 하였습니다.
그분의 설교에는 일제시대의 이야기, 한국동란의 이야기, 소련이야기등이 있었는데, 어린 시절에 들으면서도 설교라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습게도 설교는 참 쉬운 것이구나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좋아하신다는 책도 읽어 보려고 노력했고, 그분이 젊은 시절에 권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우습게도 권투 연습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때 원고를 써서 목사님에게 보여주었는데 잘 했다고 칭찬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글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느날은 엄마에게 우겨서 그분이 기도하신다는 산에도 따라가 본적이 있습니다. 그때 기도는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목사가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40일을 금식한 목사님의 얼굴은 마를 대로 말라있었습니다..
돌아돌아 갔지만 어릴 때 본받고 싶은대로 롤 모델로 삼았던 목사님처럼 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실수 투성이지만 그래도 어릴 때 흉내내고 본받으려고 했던 모습이 있어서 그런지, 지금가지 목사직을 안 내려놓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목사님도 대견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그분은 저의 아버지, 김성흡 목사이십니다.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원망했고, 사랑하면서도 목사하는 모습을 싫어하였습니다. 어릴때의 따라가고 싶었던 마음을 그대로 간직했다면 더 빨리 목사가 되었을텐데, 돌고 돌아서 30살이 돼서야 신학교를 갔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2015년 12월 13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유언대로 서울대 의과대생들을 위한 해부용으로 기증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전 서울대학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해부용으로 다 쓰고 남은 시신을 화장한다라는 것입니다. 저희 가족에서 아버지의 시신이 조각조각나서 그 뼈를 모아 화장하는 것은 슬픈일도 그렇다고 자랑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오래전에 의대생들이 해부학 시신이 없어서 의술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는 뉴스를 접하고 결정을 하고 자식들에게 30여년전에 동의를 구하셨던 아버지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가는 것이냐는 생각하게 합니다.
동생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22일 화장 한다는 것입니다. 12월 22일 서울대학교에서 마련해준 화장터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받는다고 합니다. 물론 같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형제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장남이니, 납골을 어디에다 했으면 좋겠느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납골당도 있고 나무를 사서 그 나무밑에 뿌리고 기념하는 것도 있습니다. 집에 모실 수도 있습니다. 저희는 아버지를 어머니 사시는 집, 감나무 밑에 묻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못드린 것은 아버지가 모셨던 하나님 잘 섬기다가 훗날 천국에서 선물로 드릴께요. 사랑합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