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주간 대부분의 학교에서 졸업식을
가졌고,
우리 교회에서도 많은 아이들이 졸업했습니다. 그 중 대부분은 딸들이었고,
제 딸 예림이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예림이가 졸업하는 날,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그녀를 보니 제 자리가 없는 것 같아 살짝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함이 밀려왔습니다. 지금은 희미해졌지만,
예림이의 팔목에는 깊게 새겨진 상처 자국이 있습니다. 의정부의 동신수양관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날, 두 살 난 예림이가 저에게 박카스를 주겠다고 달려오다가 넘어져 병이 깨지면서 팔목에 피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이 예림이를 안고 뛰어가는데, 저는 선교대회를 진행해야
했기에 피가 나는 예림이를 두고 집회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미국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민관은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예림이가 그 앞에서 이리저리 뛰는 모습을 보며 “이쁘다”는 말만 하고는 도장을 찍어주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의 짐이 조금은 덜어진 듯했습니다. 예림이는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여러
대학에 합격했지만,
가장 저렴한 대학을 선택했습니다. 4년 내내 성적 유지를 위해 다른 일들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선교단체에서 훈련받은 것 외에는 파티도, 연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대학 들어가기 전 수련회에서 은혜받고 성령 체험을 한 후로 매일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예림이는 대학 생활 동안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했습니다.
학자금 대출도 스스로 갚았고, 대학원도 자비로 다녔습니다. 처음 down paymnet 차도 알아서 갚고, 그 차를
저에게 다시 주고 자신은 작은 전기차를 몰고 다닙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딸 자랑입니다. 대학생이 된 예림이는 저를 ‘아빠는 독재자’라며
농담을 했습니다.
예림이에게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고, 엄마가 늘 제 말을 따르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던 예림이가 이제는 제 눈치를 줍니다. 어느 순간부터
딸이 제일 무섭게 느껴집니다. 어느 날,
딸이 “아빠, 난 결혼 못할 것 같아. 세상에
아빠 같은 남자가 있겠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세상이
다 내 것 같다가도, 제가 조금이라도 독재자처럼 행동한다 느껴지면 “아빠!”라는 한 마디에 금방 멈추게 됩니다. 예림이가 힘들어할 때 “그냥 그만둬도 돼”라고
말하면,
“아빠,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대답하며 기도하는 딸이 참 예쁩니다.
졸업하는 딸을 보는 아빠들의 마음이 다 그렇지 않을까요? 제가 한것이 없기에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