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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이용희 교수 82024-02-02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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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정기적 전도수련회로 대학생들 ‘회개의 경험’

성령체험한 대학생들 술·담배 끊어… 교역자 새로 세우고 매일 “부흥” 기도

입력 2015-09-16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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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총무를 맡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대학생들이 다시 회개하고 부흥을 경험할 수 있을까?’ 거의 매일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하듯 기도했다. 주님 앞에서 독대하며 이화여대 다락방을 주님께 올려드리며 기도했다. “주님,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회복과 부흥을 주시옵소서!”

침체된 대학생 모임을 부흥시키기 위해선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혼자서 이 일을 감당한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함께 동역할 사역자들을 찾았다. 지금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목회하는 김인철 목사, 해외선교 중인 최진희 허은아 선교사, 김진희 간사, 김영진 교수, 정성희 박현태 목사 등 많은 분이 다락방 사역에 헌신하며 자비량으로 섬겼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말처럼 복음적이면서도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대학생 모임의 교역자로 임명했다. 이들이 말씀과 기도를 강조하며 열정적으로 지도하기 시작하자 모임의 영적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여름과 겨울 농촌전도와 단기선교를 출발하기 전에 ‘WITNESS(복음의 증인)’라는 주제로 전도수련회를 가졌다. 젊은이들이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여 성령의 권능을 받고 담대한 복음의 증인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3박4일 수련회에서 많은 대학생이 큰 은혜를 받았다. 주간에는 성경공부와 전도 훈련을 했다. 밤에는 신앙 부흥회를 개최했는데 참가한 대학생들은 울면서 자신의 죄악을 철저히 회개했다. 전도를 앞두고 담대한 복음 증거를 위해 성령의 권능을 받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정기적인 ‘WITNESS’ 전도수련회 이후 대학생 모임은 갈수록 믿음 가운데 세워져 갔다. 전도수련회를 통해 많은 대학생이 성령을 체험하고 술·담배를 끊고 예수의 젊은이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농촌전도와 단기선교를 다녀온 뒤 각 모임에 돌아가서 부흥의 불씨가 됐다. 대학생 모임이 끝난 후 술집을 드나들던 구습은 사라졌다. 또 찬양만 드리고 설교 전에 빠져나갔던 찬양 선교단도 예배를 끝까지 드리며 온전한 예배자로 세워졌다. 

처음 총무를 맡았을 때 대학생연합집회를 개최하면 참석인원이 20여명에 불과했다. 2년 뒤인 98년 겨울 의정부 동신수양관에서 열린 전도수련회에는 400여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성령의 권능을 달라’고 온밤을 부르짖었다. 후배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78년 서강대 2학년 이화여대 다락방 전도수련회를 통해 주님을 영접했고 예수의 제자로 헌신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처음 총무를 맡으면서 유엔개발계획(UNDP)에 사표를 제출했으나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내셔널 컨설턴트직을 계속 수행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97년부터 대학 전임교수로 임명됐다. 이대 다락방 총무 업무는 갈수록 많아졌다. 밤에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해야 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려니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자연스레 수면 시간이 대폭 줄었고 졸음운전을 하기 일쑤였다. 한 번은 일을 마치고 이대 다락방으로 가기 위해 청계고가를 지나고 있었다. “끼이익, 끼이익.” 깜빡 잠이 들었는데 쇠가 긁히는 소리가 크게 났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내 차가 청계고가 벽을 긁으며 올라가고 있었다. 아찔했다.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백미러로 뒤를 보니 뒤따라오던 차들이 놀라서 멀찌감치 서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안전하게 모든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전적인 은혜였다. 

(24) 유럽 순방 중 그들과 신앙적 관점 차이 실감

순결·지옥 등 토론하며 원칙론 펴자 “이제는 한국서 선교사 파송해 달라”

입력 2015-09-17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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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8월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2년 총무 임기를 마쳤다. 총무직을 맡을 때부터 2년만 자비량으로 봉사할 생각이었다. 임기를 마친 후에도 다락방 이사와 제자훈련원장, 재정부장 등으로 일했다. 많은 대학생들이 다락방에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내게 큰 축복이었다.

2005년 여름 동료 교수들과 유럽을 순방하는 기회가 생겼다. 유럽 순방을 마친 후 독일 마리아 기도공동체, 프랑스의 테제 공동체 등 유명한 기독교 공동체를 방문했다. 

테제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많은 유럽 젊은이들이 모여서 찬양하며 말씀을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성경 공부 시간이 됐다. 나는 교회별로 청년들을 인솔해 온 교회 지도자들과 한 조가 되었다. 우리 조에는 목사님과 신학자, 사모님이 있었다. 함께 성경 토론을 하면서 유럽의 신앙적인 관점이 한국과 너무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번은 ‘순결’이라는 주제가 나왔다. “결혼 이외의 성관계는 간음죄입니다.” 내 말에 여러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이성 간에 서로 좋아하면 성관계를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간음이 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경의 기준대로만 살 수 있습니까?” 그들은 나를 외계인 보듯 했다.

다음 날 성경 공부시간에도 마찰은 계속됐다. ‘지옥’이라는 주제였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내 말에 네덜란드에서 온 신학자가 맞받아쳤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지옥은 없습니다. 만약에 지옥이 있다면 그 지옥은 텅텅 비어 있을 것입니다.” 나를 제외하고 네덜란드 신학자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성경말씀을 인용했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절대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다고 해서 물러설 수 없었다. 분위기는 점점 냉랭해졌다.

1주일이 흘러 마지막 성경공부 시간이 됐다. 헤어지는 시간까지 설전을 벌이는 게 좀 민망하게 느껴졌다. 내가 발표할 차례가 됐다. 주제를 바꿔 대학 시절부터 진행했던 농촌전도를 간증했다. 여름과 겨울, 방학 때마다 농촌 미자립교회를 찾아가 자비량으로 전도했던 일들을 나눴다. 

“새벽 예배를 드린 후 유초등부 학생들을 모아놓고 성경학교를 했습니다. 오후에는 집집마다 방문해서 축호전도를 했고 중·고등부 성경학교를 진행했죠. 저녁에는 마을 주민들 모두를 초청해서 전도 집회를 열었습니다. 또 전도 집회 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어요. 그들에게는 준비해 간 성경책을 무료로 나눠줬습니다.” 

유럽 각국에서 온 청년부 지도자들은 아무 말 없이 내 간증을 들었다. 이전과 다른 숙연한 분위기였다. 성경공부가 끝날 무렵 한 목사님이 나에게 진지하게 요청했다. “이 교수님, 이전에는 우리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군요. 한국교회가 유럽에 선교사를 파송해 주십시오!”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1주일간의 성경공부 때 서로의 입장차만 확인하고 팽팽한 격론을 벌였기 때문이다. 논쟁을 하면서 나도 괴로웠지만 그들 또한 부담스러웠던 것 같았다. 그들은 자존심이 강했다. 기독교의 오랜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온 한 성도가 성경을 원칙대로 주장한 일은 그들의 무뎌진 신앙의 양심을 일깨운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최근 동성애 합법화로 영적 위기에 놓인 유럽교회와 미국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테제 공동체에서 만났던 유럽 목사님의 부탁이 다시 떠오른다. “이제는 한국이 우리에게 선교사를 보내주십시오.

(25) ‘노인 만나면 큰절’ 수칙 만들어 농촌 전도활동

자비량 등 5가지 원칙 정해 ‘섬김 전도’… 마지못해 나왔던 어른들 주님 영접

입력 2015-09-1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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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앞줄 오른쪽)가 1990년대 중반 서울 영동제일교회에서 노태진 담임목사(앞줄 왼쪽 세 번째)와 성가대원, 청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일을 하면서도 교회생활을 절대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서울 강남구 논현동 영동제일교회(노태진 목사)에서 교사와 성가대 총무로 봉사했다. 

1984년 12월부터 청년부 담당 사역자가 됐다. 보통 부교역자가 맡는 자리인데 이화여대 다락방 사역과 백골부대 군종활동 등을 눈여겨본 담임목사님이 과감하게 청년 사역을 맡겼다. 유학기간을 제외하고 84년부터 87년까지, 또 94년부터 2009년까지 매 주일 청년부 예배에서 말씀을 전했다. 토요일에는 성경공부 모임을 진행했다.  

이화여대 다락방에서 농촌 전도를 다녔던 경험을 토대로 교회 청년들과 여름·겨울에 농어촌 미자립 교회로 농촌 전도를 나섰다. 전도에 집중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전도수칙을 정했다. 

첫째, 자비량 전도이기 때문에 전도의 모든 비용은 전도대가 부담하고 농촌 교회에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전도대원들은 자기 밥값과 교통비 등을 전도회비로 내야 하며 농어촌 교회에 전도대원들이 밥값을 지불한다. 둘째, 단정한 옷차림으로 전도하며 지역민들을 공손한 자세로 섬긴다. 전도활동을 할 때 반바지, 소매 없는 상의, 슬리퍼 등은 착용할 수 없으며 지역민들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갖춘다. 셋째, 지도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불평하지 않으며 군것질하지 않는다. 넷째,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전도에만 집중하며 전도 이외의 활동은 일절 하지 않는다. 친교나 오락 시간을 갖지 않으며 전도 일정을 마친 뒤에는 곧바로 교회로 복귀한다. 다섯째, 전도 기간 중 관광이나 별도의 여행을 하지 않으며 전도지에서 쇼핑을 하지 않는다.

이런 원칙을 갖고 전도를 하니 많은 열매를 맺었다. 농촌 교회에서도 고마워했다. 노인들이 그늘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계시면 먼저 맨땅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서울에서 이 지역 교회로 전도하러 온 청년들입니다. 시간이 되시면 전도 집회에 꼭 와주세요.” 어르신들에게 안마를 해드리고 찬송가도 불러드렸다.

상황이 허락되면 짧은 간증과 말씀도 나눴는데 많은 어르신들이 좋아했다. 날마다 찾아가니 마지막 날에는 미안해서라도 전도 집회에 나온 분이 많았다. 그중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어르신이 많았다. 주님을 영접한 분들의 성명과 주소를 파악해 농촌 교회 목사님께 넘겨드렸다. 4박5일의 농촌 전도는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92년 7월 노태진 목사님이 담임으로 부임했다.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고 교회 건축이 시작됐다. 유학을 다녀오고 94년 1월부터 다시 교회 청년부 지도자로 임명됐다. 90년대는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져서 농촌 전도와 해외 단기 선교를 병행했다. 95년 1월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청년들과 필리핀 마린두게섬 원주민 선교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대만 캄보디아 태국 인도 네팔 러시아 등을 방문해 복음 전파에 힘쓰고 있다. 단기 선교에서 은혜를 받은 청년들은 2∼3개월간 방학 선교, 1년 자비량 선교 등으로 헌신했으며, 이들 중에는 선교사로 나가거나 신학을 공부하는 형제들도 있다. 

93년 1차 예배당 건축이 시작됐다. 2차 공사는 97년부터 시작됐으며 98년 말 성전 봉헌 예배를 드렸다. 교회 건축이 시작되면서 2차 건축 헌금을 작정할 때는 당시 1년 연봉이 넘는 금액을 작정했다. 건축 공사가 끝나기 전 작정 헌금을 드리기 위해 최대한 돈을 아끼며 모았다. 건축헌금을 위해 적금도 들었다. 드디어 적금 만료일이 됐을 때 수표로 건축헌금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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