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고난의 행군’ 북한주민 위해 63일간 특별기도굶주림 외면하는 남한교회 회개 촉구… 北실상 알리는 자료 발송에 밤샘 일쑤입력 2015-09-11 00:32 수정 2015-09-11 18:43
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오른쪽 네 번째)가 1996년 경기도 남양주 기도원에서 월요기도모임 회원들과 함께 북한 구원을 위한 기도회를 열고 있다. 1992년 결성된 월요기도모임은 94년부터 북한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그해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경제가 몰락했고 95년부터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평양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선 식량 배급이 중단됐다. 배급에만 의지하던 북한 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굶어 죽기 시작했다. 노인과 어린아이가 제일 먼저 희생됐다. 노인들은 어린 손주들부터 식량을 먹이라고 양보하다가 죽어갔고 어린아이들은 영양실조를 버티지 못하고 죽어갔다.
설상가상으로 96년 여름 콜레라가 창궐했다. 홍수가 나서 다리가 끊어졌다. 황해도에서만 7월 한 달간 죽은 사람이 10만명이라는 뉴스를 접했다. 월요기도모임에서 이런 소식을 나누며 북한 동포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해 7월 29일 월요일 저녁이었다.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채플에서 월요기도모임 회원들과 북한 구원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영적 중압감에 더는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때였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애절한 음성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 같았다. “누가 굶어 죽는 북한 동포들의 이웃이 되겠느냐?”
죽어가는 형제를 외면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은 곧 우리 모습이었다. 여기저기서 통곡이 터져 나왔다.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굶어 죽어가는 북한 동포들을 외면했던 남한교회의 죄악을 회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9월 30일까지 63일간 북한 구원을 위한 특별기도운동에 돌입했다.
특별기도운동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하루 3번 식사기도 때 북한 동포 식량난을 위해 기도한다. 둘째, 하루 30분 이상씩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한다. 셋째, 63일간 릴레이 북한 구원 금식기도를 한다. 넷째, 8·15 광복절 1일 특별금식기도회를 갖는다.’ 63일 동안 회원들은 릴레이 금식을 하며 북한 동포들의 영육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북한 동포들이 굶어 죽어가는 참혹한 상황입니다. 굶어 죽지 않으려고 목숨 걸고 압록강 두만강을 넘는 탈북민들의 비참한 삶을 알립시다!” 회원들은 북한의 처참한 현실을 남한의 모든 교회에 알리기로 했다. 인쇄물을 만들어서 전국 5만 교회에 발송하기로 했다. 마침 유엔개발기구(UNDP)에서 3일 휴가를 얻은 상태였다. 아버지께서 중풍으로 말씀을 못 하시고 반신불수가 되어 아버지의 치유를 위해 3일 금식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조용한 기도 처소에서 기도를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3일 동안 중풍에 걸린 아버지가 아닌 북한 동포들의 영육구원을 위한 기도만 나왔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특별한 체험이었다. 금식기도를 하면서 남한교회에 북한의 처참한 상황을 알리며 각성을 촉구하는 글을 썼다.
월요기도모임 회원들과 3주간 밤마다 5만 교회에 북한 실상을 알리는 자료를 발송했다. 대부분 직장인이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할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한 회원이 이렇게 말했다. “북한을 살리기 위해서 남한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회원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직접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우리는 모두 동의했다.
회원들은 퇴근 후 밤새 발송 작업을 했다. 수면이 부족했다. 오전에 근무를 하면서 졸음이 쏟아져 참을 수 없을 때는 화장실에서 10∼20분씩 눈을 붙이고 나오기도 했다. 극동방송에서 북한 상황을 알리는 방송도 했다. 직장 동료들은 그런 나를 진심으로 도와줬다. 내가 출연한 극동방송을 청취한 한 동료는 북한 동포를 살리는 일에 사용해 달라며 금일봉을 건넸다. (21) ‘탈북민 참상’ 듣고 기도모임서 구출 사역 전개中 단기선교팀 충격적 보고에 놀라… 비밀리에 구출 사역자들 후원 시작입력 2015-09-14 00:35
탈북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제작된 ‘살려주세요. 반인륜 범죄의 현장, 북한교화소 이야기’에 수록된 삽화. 탈북민들이 철사에 손과 코가 꿰인 채 끌려가고 있다. 북한인권제3의길 제공 “하나님, 북한 동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저에게 부어주십시오!”
1996년 7월 29일 월요기도모임이 있었던 그날 밤 나는 이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때부터 밤이나 낮이나 북한 동포들의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하는데 견딜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 직원식당에서 음식을 앞에 놓고 식사기도를 할 때였다. 북한 동포들이 굶어서 쓰러지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들이 떠올랐다.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식사하는 동료들이 민망했는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자다가도 깨어나 북한 동포 생각에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오열하며 주님께 기도했다. 그렇게 여러 날 북한 동포들을 위해 울었다.
어느 날 중국 단기선교를 다녀온 월요기도회 선교팀이 귀국 후 집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기도모임에 왔다. 그들은 울면서 충격적인 보고를 했다.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인 한 도시에서 북한 보위부원들이 중국 공안으로부터 탈북민들을 넘겨받아 북한으로 끌고 갔다는 것이었다.
“중국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북한 보위부원들이 탈북민들을 사정없이 때리고 손바닥을 합장시킨 뒤 거기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그리고 철사로 굴비 꿰듯이 줄줄이 꿰어 북한으로 끌고 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장면을 본 선교팀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북한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월요기도모임에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단숨에 달려왔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너무나 잔혹한 상황을 듣고 나니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같은 국민으로서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다룰 수 있을까?’ 이날 밤 기도모임 참석자들은 다같이 울면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 우리 북한 동포들을 제발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탈북민들을 구출하겠습니다. 더 이상 중국 공안에 붙잡혀서 강제 북송당하지 않게 도와주세요.”
그때부터 기도 중심으로 운영되던 월요기도모임은 탈북자 구출운동에 나섰다. 비밀리에 북한 선교사역과 탈북자 구출 사역을 하는 분들을 후원했다. 그리고 탈북민 구출 사역자들을 초청해 그들의 사역 이야기를 듣고 기도제목을 나누며 함께 기도했다. 이렇게 북한 선교 사역과 탈북민 구출 사역을 시작한 지 어느덧 19년이 흘렀다.
탈북민 사역을 진행하면서 막연하게 들었던 북한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탈북민들이 생생하게 들려주는 북한 이야기는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많은 사람이 굶어 죽으면서 여러 지역에서 인육을 먹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런 흉흉한 소문도 있었다. “사람이 너무 오래 굶으면 정신착란 증상이 온다. 어떤 부모는 기어 다니는 것이 닭이나 개로 보여 잡아먹었다. 나중에 정신이 들고 보니 자기 자식이었다.” 인육을 먹는 사태가 다수 발생하다 보니 북한 정권에서는 인육사건 처리 규정까지 만들어 각 지역 보위부에 시달할 정도였다. 한 탈북민은 이 문건을 숨긴 채 탈북한 뒤 한국 언론에 제보하기도 했다. 인육사건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었던 탈북민들에게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96년 9월 북한 동포를 위해 뜨겁게 기도하고 있을 때였다.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사무총장이었던 전재옥 이화여대 신학대학원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화여대 다락방에서 총무직을 맡아주십시오.” 총무직은 통상 목사님들이 풀타임으로 맡았다. 그런데 다락방전도협회 졸업생 출신으로 평신도인 나에게 총무직을 제의한 것이다. (22) UNDP 그만두고 ‘이대 다락방’ 총무직 맡고 보니…그동안 모임 줄고 영적으로 많이 침체… 대학생들 집회 후 술집으로 향하기도입력 2015-09-15 02:45
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왼쪽)가 1997년 5월 전재옥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사무총장(앞줄 왼쪽 두 번째), 협회 간사 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목회자도 아닌 내가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총무라는 직책을 맡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2주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전재옥 이화여대 다락방 사무총장님께 말씀을 드리고 기도를 시작했다. 1996년 여름은 북한을 위해서 63일 동안 매일 드렸던 기도와 릴레이 금식기도, 전국 5만 교회에 북한의 참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아버지까지 간병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어려운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아버지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풀타임으로 총무직을 수행한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았다. 2주가 지났다. “사무총장님, 제가 풀타임으로 총무직을 맡긴 어렵습니다. 대신 지금 맡고 있는 유엔개발계획(UNDP) 컨설턴트직을 내려놓고 대학으로 직장을 옮기겠습니다. 그래서 다락방 총무와 교수직을 병행하며 섬기겠습니다. 학기 중에는 1주일에 3일을 이화여대 다락방에 와서 일하고 방학 때는 매일 출근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평신도이므로 자비량 사역자로 일하겠습니다.” 당시 나는 UNDP 컨설턴트를 하면서 경원전문대학 무역과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UNDP에서 사표가 곧바로 처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96년 9월부터 이화여대 다락방 총무와 UNDP 컨설턴트 일을 동시에 하게 됐다. 총무직 결정을 앞두고 많이 고민했지만 맡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서강대 재학시절 이화여대 다락방에서 받았던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총무직 수락 여부를 놓고 기도할 때 대학 2학년 시절 농촌 전도수련회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예수의 제자로 살겠다고 다짐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또 대학생연합회 회장을 하면서 전국의 농촌 전도팀을 섬기고 대학생 후배들을 가르쳤던 소중한 기억들이 생각났다. “그래, 믿음의 고향이자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훈련시켜준 이화여대 다락방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예!’ 하고 순종하는 것이 맞다.”
당시 다락방 대학생 모임이 영적으로 많이 침체돼 있었다. 후배들에게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총무직을 수락한 뒤 97년 봄 학기부터 대학에서 전임교수로 일하게 됐고 지금까지 가천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총무로 부임해 보니 이화여대 다락방은 내가 대학생 때 활동하던 선교단체가 아니었다. 과거에는 8개의 대학생 모임이 있었고 200∼300명 정도가 20여개 팀을 꾸려 전국으로 농촌 전도를 나갔었다. 그런데 내가 총무를 시작했을 때는 대학생 모임 수가 대폭 줄어 있었다. 농촌 전도 참가자도 70∼80명밖에 되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학생 모임의 신앙 열기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어떤 대학생 모임은 집회 후에 술집으로 향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악을 전공한 찬양 모임은 예배 때 찬양 후 설교도 듣지 않고 곧바로 나가버렸다. ‘자신의 역할은 찬양이니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영적으로 침체된 모임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은 새롭게 모임을 개척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유학과 직장생활로 이화여대 다락방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다가 다시 돌아와 보니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다.
고려 말 신하였던 길재가 조선이 들어선 이후 고려의 융성했던 수도 개성이 쇠락한 것을 보고 인생무상을 느끼며 지었던 시조가 떠올랐다. ‘오백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옛날 그대로 변함없다)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