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 부터 책을 좋아했습니다. 구박을 받으면서 헌책방에 들어가 있으면 몇 시간이라도 눈총 받으며 있었습니다. 누나방에 있는 삼중당(크기가 작은 소설책을 많이 만들어 냈던)소설을 초등학교때 읽기 시작했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고전은 거의 다 읽게 되었습니다. 헤르만 헷세를, 싸르트르를 만난 것도 고등학교 때입니다.
데미안이라는 소설속에서 싱클레어가 고민하고 고독해 하는 것이 곧 저의 청소년기처럼 느껴져 여러번 반복하며 읽었습니다.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저의 연인처럼 품게 되었습니다.
10대를 보내고 10여년이 지나 예수님을 만나고 청년사역을 하게 되었을때, 당연히 청년들이 데미안은 다 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대화를 하는데, 어느 누구도 데미안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너무 당황했었습니다. 그보다 청년들이 만화 가게에서 하루 종일 만화를 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위 명문대라고 불리웠던 학생들이, 더구나 의사가 되겠다는 학생들이 만화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즐거워 한다는 사실에 적잖게 고민했습니다. 저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가수가 나왔을때, 더 이상들을 음악은 없겠구나 하고 대중가요를 접었는데, 학생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그들을 향해 ‘오빠’라고 외치며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문화가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 이상 철학이나 인문학을 논하는 것은 그들과 벽을 쌓는 일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트렌드는 가벼움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기기들을 가볍게, 간편하게 만드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가볍고 빠르고 간편해야 합니다.
더 이상 수십년 사용하는 튼튼한 것을 선호하기 보다는 그때 그때 필요하고 또 바꿀 수 있는 것들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디자인도 심플한 것을 요구하고, 요즘 집안의 디자인도 초간편함을 추구합니다. 핸드폰이 3년 이내에 배터리가 나가는 것에 화내지 않습니다. 그전에 다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계도 가벼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복잡한 것을 딱 질색하는 사람들의 성품은 가볍게 만나고 가볍게 헤어지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문화적인 것은 가정에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혼밥(혼자 밥먹기) 혼술(혼자 술마시기) 그리고 혼족(혼자사는 사람들)입니다. 더이상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보다 독립해서 혼자사는 것이 익숙한 젊은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괜히 삶을 무겁게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교회 문화도 바뀌었습니다. 공동체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 집니다. 무거운 예배보다는 가볍게 찬양하며 나아가는 것을 선호합니다. 예배형식의 파괴가 이루어진 것은 오래입니다. 긴 설교를 불편해 합니다. 무거운 주제는 피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시대를 질 리포베츠키는 ‘가벼움의 시대’라는 책에서 이것이 세상의 흐름이고 미래다 말을 합니다. 그런데, 참 아쉽습니다. 가벼운 시대를 살아간다고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피하고 사는 것뿐입니다. 땅에 여전히 발을 디디고 살며 우리는 그렇게 살면 하늘에 사는 것인양 점점 더 가벼움을 추구합니다. 진정한 가벼움은 단순함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 땅을 밟고 사는 동안 행하는 결정의 단순함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벼움은 그 단순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끔 단순함은 무엇보다 무겁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