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마치 17년전 30대의 목회자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그것은 편하게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집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분들 앞에서 주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잘 안되는 청년 김우성집사입니다.
처음 김우성 집사를 만났을 때 20대 중반의 나이였던 김우성 집사는 학교 가까운 교회에 와서 라면 먹고 농구하고 컴퓨터 하고 잠깐 학교근처의 교회를 나오다 떠나는 사람중에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한사람 한사람씩 친구를 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한사람이 김경환 집사입니다. 중간에 몸이 아파 일년여 한국에 들어가 있었던 적이 있었지만 그 외에는 뉴욕으로 떠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하였습니다. 김우성 집사만 있으면 분위기를 편하게 만드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습니다. 어른들에게 예의가 바르고 주변을 잘 챙기다 보니 모든 사람들이 김집사를 좋아했습니다.
때때마다 교회에서는 파티가 열렸습니다. 다른 파티가 아닌 삼겹살 파티였습니다. 주일날 밤에는 청년들이 의례히 교회를 점령하고 밤까지 놀았습니다. 그런 일에 김집사는 교회에서 해야할 일과 하지 말하야 할 일에 대한 중심을 잘 잡았습니다.
어려운줄 모르고 살다가 부모님 사업이 어려울때 배달하는 일을 하며 보냈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 과정을 잘 넘어가고 고든 콘웰대학교 박사과정에 들어가고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삶이 진행되어져 갔습니다. 몇 년에 한차례씩 교회를 방문했는데, 감사하게도 지난 5월에 박사 과정을 준비하면서 마지막 논문 쓰는 것을 이쪽 플러튼에 머물면서 행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곧 오래전의 그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전 성품 그대로 새벽예배부터 긍휼사역, 큐티모임 등 교회의 모든 일들에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돌아가는 것이 활발해 졌습니다. 한사람의 영향력이 그렇게 분위기를 바꾸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다 같지 않을까요? 어른들마다 사람욕심을 내며, 우성집사의 직장이 이쪽 캘리포니아에 있기를 기도한다고 합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김우성 집사가 잠시 한국에 들어오려고 한적이 있었습니다. 김집사를 주례한 목사이니 걱정이 돼서, 모든 것을 다 끝내기 전에는 들어오지 말고 내가 미국에서 만나길 원한다는 협박도 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오랜 관계 때문인지 그런 말에 토달지 않고 남아 있어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오는 목요일에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10월이나 11월쯤 논문심사를 위해 뉴욕으로 직접 갈것 같다고 합니다. 벌써 마음이 안 좋습니다. 막내 예준이가 “우성이 삼촌 한국 가는 것 아느냐?”고 자꾸 물으며 그러면 집에서 밥을 먹어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미 약속되어진 일들이 있고, 그러기에는 이미 교우들과 더불어 많은 시간을 우성집사가 같이 보냈습니다. 그냥 가족과 같기에 오랜만에 만나도 편한 사람입니다.
훗날 김우성 집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아름답게 쓰임받을 때 5개월 이상을 교회 한 구석에서 기도하며 보냈던 시간이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을까요?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우성아 너가 있어서 참 행복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