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세인 권사님의 어머니이신 송동호 권사님께서 지난 월요일 아침 7시 20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96세....
6. 25동란에 남편을 잃고 31살에 딸 하나를 둔 과부가 되셨습니다. 그 상태로 55년을 홀로 사셨습니다.
늘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다면 이승만 대통령 때 경무관에서 일하는 서기관이 잘못 행동하자 따귀를 때리셨다는 이야기부터, 불의한 일을 당하면 쫓아가서 한바탕 난리를 피우셨다는 말씀을 종종 하시곤 하셨습니다. 홀로 지내시면서 권사님 자신을 보호하시려는 것 이었다 생각됩니다. 권사님은 강하신 분이셨습니다.
30대의 청상광부가 무엇을 하며 먹고 살까 고민하시다가 손댄 것이 바로 건축이었습니다. 땅을 사서 집을 짓고는 그것을 파시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처음으로 지은 집이 저희 집사람이 태어난 전농동이라 같은 동네 주민이라고 좋아하셨습니다.
건축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남자 분들인데, 현장에서 지휘하시며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힘들지 않으셨나고 여쭈었더니, 처음에만 어려웠고 요령이 생기시니 더욱 크게 일을 벌리기 시작하셨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한국의 큰 집들을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돈이 되었습니다.
일이 잘되기 시작하자, 친척들이 권사님 댁에서 머물며 조카들을 대학까지 공부시켰다고 합니다. 권사님이 품도 넓으시고 여장부 이셨던 것입니다.
가끔 곽세인 권사님 말씀 하실 땐 눈이 반짝반짝 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잘 키우시기 위하여 애쓰고 노력하셨던 어머니의 마음도 느껴지셨습니다. 곽병만 장로님을 사랑하시지만 사랑하는 딸, 미국으로 데리고 갔다고 원망도 많으셨다고 합니다.
권사님은 천재셨습니다. 곽병만 장로님이 가끔 “우리 어머니 공부만 하셨으면 대학 총장은 하셨을 분”이라 하셨는데, 맞는 말씀이셨습니다. 한번 보신 것, 들으신 것은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90이 넘으셨어도 눈도, 귀도 기억력도 모두 젊은 사람들보다 못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이상 집에서 지내시는 것이 어려워 들어가신 양로병원! 입맛 까다롭기로 소문난 권사님은 따님이 해주시는 것 외에는 잡수시려고 하지 않아, 권사님도 장로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절반이 치매 걸린 분들이니, 그분들과 함께 사시려니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다행히 특유의 기억력과 친화력으로 같이 사는 모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일하시는 분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권사님 여기서 다른 분들 천국 잘 가시도록 권사님이 힘써주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잘 그일을 감당하셨는데, 코로나 사태로 더 이상 사람을 만나는 것도 같이 대화를 하는 것도 어려워 지시자 급속히 안 좋아 지기 시작하셨습니다.
지난 목요일, 천국에 대한 소망을 전하자, 고개를 끄덕이시고 손을 흔들어 화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있었던 임종예배.... 그날은 권사님 96세 생신이셨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날을 보내시고 돌아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