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의 마지막 날 김성봉 집사와 김이준 집사가 결혼하였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두분의 어머니들이 결혼식을 위해 참석하셨습니다. 두 분의 어머니와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김이준 집사의 어머니 이인자 권사님은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어서 오시기만 하면 교회가 잔치를 벌리는 것처럼 행복했고, 김성봉 집사의 어머니는 심한 당뇨로 그때도 몸이 안 좋으셨습니다. 멀리 여행을 가실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가까운 라구나 비치에 방문했습니다. 넓은 바다를 보시며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셨습니다. 비치 밑까지 내려가 바위를 걸을 때 밀물에 들어왔던 해삼이 벗어나지 못하고 얕은 물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권사님이 보시고 너무 신기해 하시면서 잡아서 가져 가자고 하셔서, ‘여기서는 잡아 갈 수 없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더니, 그 말씀을 이해 못하셨습니다. 저도 이해 못하는데, 권사님이 어떻게 이해하셨을까요? 못내 아쉬워 하시는데 제가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몸이 안 좋으셔서 멀리 가시는 것도 힘들어 하셨지만 찬양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권사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찬양...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살았도다...” 권사님이 세 자녀를 키우며 힘을 내셨던 유일한 힘은 예수님 이셨습니다. 한국에 가면 늘 가뵈었던 분은 김성봉 집사님의 어머니이셨습니다. 2003년도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뵈었을 때, 권사님은 몸이 안 좋으셔서 모든 음식이 싱거웠고 밥은 시커먼 잡곡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목사가 왔다고 음식을 내오셨습니다. 싱거운 음식에 들어간 양념은 바로 사랑이었고 신앙이었습니다. 싱거운 식사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권사님의 사랑과 신앙적 간증이었습니다. 제가 방문한 집중에 가장 작은 집이었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가장 작은 집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작은 집에서 신앙으로 자녀들을 키우며 눈물로 살았습니다. 오로지 자녀들만을 위해서 살아간 어머니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집을 떠날 때 손을 붙들고 “목사님, 우리 성봉이 가족이 되어 주세요” 그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김성봉 집사와 18년을 같이 했으니 김성봉 집사의 부침을 많이 보았습니다. 김이준 집사와 결혼을 하고나서 삶의 안정을 가지고 지성이 온유 귀한 자녀를 잘 키웠지만, 때때마다 재정적인 이유로 노래를 포기하기도 했고, 동업했다가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가족이라 생각했다가 너무 마음을 몰라줘 섭섭하기도 했지만, 제 마음 가운데 있었던 것은 권사님이 부탁하셨던 말씀입니다. 그리고 권사님은 저를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돌아가시고 소식을 알리는 김성봉 집사의 울먹이는 소리에, 가슴이 아프고 권사님의 삶이 아프게 지나갑니다. 그러나 어쩌면 참 감사한 일입니다. 더 이상 우는 것이 없고 아픈 것이 없는 하나님의 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권사님의 아름다운 신앙이 지성이 온유를 통해 이땅에 깊이 흘러가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