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4월! 오랫동안 공들였던 중국문화선교에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30여명이 넘는 성악과 학생들이 공연하는 것은 비밀리 할 수 없기에 공산당 종교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허락의 조건은 문화교류!
문화 교류하는 차원이기 때문에 저희가 몇 곡을 부르면 중국교회도 교류 차원에서 같은 수의 찬양을 합니다. 부르는 찬양, 앵콜 곡까지 찬양의 제목 및 가는 인원이 미리 제출되어야 가능한 일인지라, 이미 1월에 연대, 이대 성악과 학생들로 구성된 노래선교단이 준비한 곡들이 그리고 인원이 중국에 전달되었었는데, 갑자기 학교측의 장난으로(?) 노래선교단이 중국가기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중국당국과의 약속이고 이를 통해서 중국교회와 같이 하는 선교사님들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포기할까 하다가 급하게 다른 학교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찾은 것이 서울대 성악과입니다. 신실한 학생들 몇몇을 만나서 의사 타진을 하고 기도하며 준비하자고 했습니다. 1기 학생들이 성악과 학생들을 모아 보겠다고 했고, 드디어 1999년 5월의 첫 번째 월요일날 서울대 캠퍼스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기도하며, 긴장하며 첫 만남을 기다렸습니다.
대략 15여명이 모였던 첫 예배를 시작으로 서울대 찬양선교단이 구성되었습니다. 처음 만남 6명으로 시작하였던 서울대 선교단은 그해 30명이 넘는 인원들이 중국을 갔고, 그리고 매해 세계선교를 나가는 선교단이 되었습니다. 제가 섬겼던 기간은 대략 1년 반밖에 되지 않지만, 초대 목사였고, 정관을 비롯한 처음 정신을 함께 나누어서 그런지, 22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관계가 연결되어 집니다.
서울대 찬양선교단 출신인 주혜자매가 미국으로 유학와 저희교회 솔로리스트로 봉사하였고, 그리고 참 좋으신 이종성 장로님의 아들, 명수 형제를 만나 어제 결혼을 하였습니다. 서울대 찬양선교단이 아니었다면 과연 만날 수 있었을까요?
44년전 중등부에 올라가자 20대 중반, 갓 신학교를 졸업하신 전도사님이 계셨습니다. 찬양을 유난히 좋아하시던 전도사님이 결혼하시면서 첫날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해서 기도원에서 보내셨습니다. 중학교 2학년인 저에겐 그 모습이 멋지게 보여 저도 “하나님 저도 결혼하게 되면 첫날은 기도원에서 보내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잊고 있었던 그 서원 기도를 16년이 지나 결혼할 때 첫날밤을 영락기도원에서 보냈습니다.
지금은 은퇴를 앞두신 노동혁 목사님!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다른 교회로 가신 목사님을 43년 동안 한번도 뵌적이 없는데 이제 은퇴를 앞두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아드님이 오늘 찬양을 하는 노영한 군입니다. 그 사실을 불과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 영한이의 얼굴엔 목사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서울대에 기도하며 낙성대 고개를 올라갔던 23년 전의 은혜를 오늘 예배 현장 가운데 경험합니다. 역시 하나님은 만남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교우들은 예배 가운데 그 만남의 은혜를 경험합니다.